여는 글
변화를 받아들이고 계신가요?
책 좋아하는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떨었습니다. 역시 가장 핫한 키워드는 ‘북페어’ 그리고 ‘민음사 빵’이었습니다. 독서 인구는 줄어들고 있지만 텍스트힙(Text Hip) 트렌드는 이어진다고들 하니, 어떤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10년 전쯤인가요? 특이한 상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수 루시드폴이 홈쇼핑 채널에 나와 자신이 농사지은 귤과 음반을 함께 파는 것을 보면서 든 생각인데요. 작가들이 자신의 책을 궁금해하는 독자의 집을 찾아 일회성 이벤트로 ‘방문판매’를 하는 거죠. 내 책을 직접 소개(영업)해서 팔고 그것을 영상으로 찍어 유튜브 송출! 젠지세대 작가들은 “와, 재밌겠다”고 반응할지 모르지만, 1980년대 이전에 태어난 작가들은 “이게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냐”고 혼쭐낼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책’도 상품이라는 사실에 의문을 가져선 안 된다는 게 저의 짧은 지론입니다. 이 좋은 텍스트를 어떻게 잘 포장할 것인가, 어떤 마케팅 언어로 전달할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동시에 트렌드를 무조건 배척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변화를 지나치게 늦게 수용해서 성공한 사례는 여태 보지 못했거든요.
‘행간과 여백’은 북 매거진입니다. 뉴스레터이지만 동시에 웹 매거진을 표방하죠. 스낵컬처 시대에 다소 긴 글을 엮고 있자니, 우리의 포지셔닝이 괜찮은 걸까? 의문이 들 때도 있지만 한 달에 딱 한 번 찾아가는 매거진이니까요. 여러 번 클릭해서 읽어주십사 부탁드려 봅니다.
26호 ‘행간’에서는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 최우현 작가의 『가자의 목소리』 서평, 박혜수 작가와 장일호 〈시사IN〉 기자가 함께한 『퍼펙트패밀리 주식회사』 북토크 이야기를 담아냈습니다. ‘여백’에서는 ‘작가의 말들’, 장일호 기자의 연재 칼럼 그리고 5년 만에 다시 문을 연 ‘불광문고 수련점’ 장수련 대표의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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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이스라엘을 증오할까요?” 올해 초, 내가 참여하는 팔레스타인 연대 시민모임에서 누군가 사람들을 향해 던졌던 질문이다. 나는 물론이고 그 자리에 있던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이 백수십 년에 걸쳐 자행해 온 팔레스타인 식민화는 어쩌고요?” 라며 반문한 사람조차 없었다. 돌이켜보면 아주 예리한 질문이었다. 아마도 우리 모두는 확인받고 싶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에 의한 집단학살이 3년 가까이 이어지는 상황에서도 팔레스타인 사람들만은 증오에 물들지 않았을 거라는 이기적인 희망—좀 더 윤리적인 만족감을 느끼며 팔레스타인 ‘해방’을 외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을 말이다.
『가자의 목소리』를 읽으며 그날의 질문이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이 책의 저자들은 우리와 같은 ‘세계의 특권적 다수’가 “이스라엘을 증오하나요?”라고 물을 때 자신의 가족이 연명을 위해 섭취하고 있는 동물사료와 쿠바이자풀(가자 길거리에서 자라나는 야생풀)을 말없이 들어 보일 사람들이다. 그런 질문에 답할 시간에, 집단학살로 죽은 사람의 숫자와 파괴의 통계를 한 번 더 되새김질할 사람들이다. 23명에 이르는 저자들은 지금도 저마다의 자리에서 이스라엘의 집단학살이 파괴한 가자의 모든 생명과 비-생명의 마지막 숨을 기록하고 있다. 자신들의 목소리도 불태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몸 안에 남은 마지막 습기를 동원해가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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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이 칼보다 강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 ‘등가물’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어느 철학자는 말했다. 펜에 녹아든 저항 의지가 칼을 부식시킨다. 칼 든 자들의 정신에 불가역적인 타격을 가한다. 이 책의 저자들 역시 논문, 르포, 보고서, 에세이, 다큐멘터리, 시, 그림, 만화라는 ‘펜’을 들고 이스라엘 시오니즘이라는 ‘칼’에 대항한다. 당연히 상처도 입는다. 아흐메드 알나우크는 이스라엘군의 폭격에 아버지와 친형을 포함한 21명의 가족을 잃었다. 모사드 아부 토하는 이스라엘 검문소에서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벌거벗겨졌고, 히바 아부 나다는 한 편의 시와 함께 땅에 묻혔다. 이만 바셰르는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을 잃고 외국으로 쫓겨났다. 리나 문디르의 글은 살아남은 데 대한 죄책감에 붙잡혀 있고, 말라카 슈와이크의 글에는 분노가 넘실거린다. 저자들의 힘겨운 싸움은 잘 쓴 논평으로 저항의 당위를 설명해야 하는 “완곡어법의 시대”가 지나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여기에는 제삼자의 윤리적 만족을 위한 서사 따윈 들어설 공간이 없다.
저자들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건 결국 질문이 아닌 행동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언제 행동에 나서야 하는가? 세계시민을 상대로 ‘해방’의 격문을 작성하는 니나 라카니, 수전 아불하와 등은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죽음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괜찮다. 그 대신 개, 고양이와 같은 동물을 각별히 아끼는 사람이라면, 탄소배출로 인한 기후위기에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역사적 유적·유물, 문화·풍속 등의 보존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학문과 언어의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외침이 들려오는 곳으로 고개를 돌려보라.’ 그렇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우리가 사랑하는 거의 모든 것들이 절멸과 파괴의 기로에 처해 있다. ‘지금 이 순간’ ‘오직 당신만이’ 팔레스타인을 도울 수 있다. 『가자의 목소리』가 우리에게 발신한 유일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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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현
『나는 전쟁에 불복종한다』저자이자 독립연구자. 대학원에서 전쟁 프로파간다를 주제로 공부했다. 6년여간 포병장교로 복무하고, 전역 후 국방부 산하 연구기관(KIDA)에서 일하며 총 10년 가까이 군문에 몸담았다. 군 생활을 하며 가볍지 않은 후유증들을 얻고 세상에 나왔다. 특히 청력의 70퍼센트를 상실해 보청기 없이는 잘 듣지 못하고, 이명 같은 노이로제성 병을 달고 산다. 하지만 덕분에 전쟁과 폭력의 야만에 예민하게 감응할 수 있는 또 다른 귀를 얻게 됐다. 더 이상 총성이 듣기 싫어서, 또 군인 시절 자신의 폭력성을 반성하고 싶어 평화를 공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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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23개의 이야기를 담은 『가자의 목소리』가 알라딘 북펀드로 출간 전 독자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북펀드는 9월 20일(일) 마감됩니다.
『가자의 목소리』가 전하는 연대의 목소리에 함께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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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 “괜찮아요”
장일호(이하 ‘장’): 작가님은 질문을 통해 타인의 경험을 수집하고, 그 경험을 모아 다시 ‘우리’를 드러내는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그 끝에는 결국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남는 것 같아요. 그렇다면 요즘 작가님이 품고 있는 질문은 무엇인가요?
박혜수(이하 ‘박’): 사람들에게 좀 더 부탁하면서 살아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만, 정작 저도 도움을 청하는 일을 어려워해요. 그래서 요즘에는 입에 달고 사는 ‘미안해’와 ‘고마워’라는 말을 자주 생각해요. 정말 마음에서 나오는 말인지, 너무 입에 붙어버린 건 아닌지 고민하게 돼요.
책에서도 언급한 『미우라 씨의 친구』에 등장하는 로봇은 “응”, “그래”, “괜찮아” 같은 평범한 말만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그런 말이 오히려 어렵더라고요. 특히 가까운 사람에게는 더 그래요. 정작 가까운 사람에게 해야 할 말은 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예의상 쉽게 건네는 말들이 있는 것 같아요.
장: 전시장에 들어오면서 보셨겠지만 배우 한 분이 앉아 계시죠. 그 작업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에 관한 질문도 등장합니다.
박: 이번에는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사람’을 만들어봤어요. 배우가 건네는 질문 중 첫 번째가 “당신이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은 무엇인가요?”예요. 그런데 정말 많은 사람이 “괜찮아”라고 답해요. 그 목소리를 듣다 보면 느껴져요. ‘이 사람, 안 괜찮구나.’ 괜찮지 않은데도 괜찮은 사람처럼 보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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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혜수, 〈듣기만 하는 사람〉, 금호미술관 《사람들은 진실에 관심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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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빌리려다 ‘나’를 발견하다
장: “가족을 빌려드립니다”라는 프로젝트를 시작했는데,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빌리고 싶어 했던 대상이 ‘자기 자신’이었다는 대목이 인상 깊었습니다.
박: 처음에는 사람들이 꿈꿔왔던 남자친구나 여자친구처럼 원하는 누군가를 빌릴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한 분은 자기는 야근을 하고, 대신 예쁜 엄마를 빌려 아이들을 놀이동산에 보내겠다고 했어요. 또 어떤 분은 부모님이 좋아할 만한 ‘애교 많은 아들’을 빌려드리고 자기는 있는 그대로 있겠다고 했고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타인을 먼저 생각하는 일이 너무 오래 내면화된 나머지 ‘나는 누구인가’를 잊어버린 게 아닐까 생각했어요.
사연을 들려주시는 분들에게 원하는 것을 물어봐도 계속 아이들이 원하는 것만 말씀하세요. 그래서 “그러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누구를 빌리고 싶으세요?”라고 물었더니 한 분이 “옆에서 내 말을 들어줄 수 있는 친구요”라고 하시더라고요. 하루 종일 혼자 가게를 운영하면서 아무와도 말하지 않는 날이 많다는 거예요. 사실 그분에게 필요했던 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단 한 사람이었던 거죠.
그때 우리가 자기 자신을 너무 소홀히 여기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일 먼저 나를 포기하고, 함부로 대하고요. 한 번쯤은 ‘나는 나를 존중했는가’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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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패밀리 주식회사』는 SF인가?
장: 작가님은 가상의 미래와 가상의 가족을 만들어버리잖아요. 그래서 저는 ‘이건 SF가 아닐까?’라는 생각도 했어요. 작가님은 이 책을 어떤 장르라고 생각하세요?
박: SF라고 말씀하셨을 때 저도 신선했어요. SF라고 해서 꼭 우주인이 등장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아주 일상적인 이야기도 SF라는 틀로 보면 새롭게 보일 수 있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 작업으로 일종의 경고를 던지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예상보다 적극적으로 참여했어요. 실제로 사연을 보내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고 했고요.
그렇다고 끝까지 이걸 ‘가짜’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현실과 거짓말을 섞으면서 설정을 만들어갔죠. 그러다 보니 이제는 저도 조금 헷갈리기 시작했어요. (웃음)
가족은 꼭 혈연이어야 할까?
장: 이 작업을 하면서 “이것 하나만큼은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 있을까요?
박: 이 프로젝트를 시작한 계기 중 하나가 제가 싱글이고 ‘고독사’를 꽤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이후의 삶을 생각해 보면, 지금의 가족제도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생활동반자법 같은 제도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요. 꼭 혈연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아니더라도 동료나 친구와 함께 살아가면서, 일종의 ‘친구 가족’을 이루고 노년을 즐겁게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어요.
그런데 우리 사회는 여전히 혈연을 중심으로 너무 강하게 구성되어 있잖아요. 그 부분이 조금은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저는 가능하면 노후를 집에서 보내고 싶어요. 요양원이 아니라요. 우리 사회에서는 몸이 조금만 불편해져도 곧바로 요양원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노년의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공간과 방식이 지금보다 훨씬 다양해졌으면 좋겠어요.
도움을 받는 것도 훈련이 필요하다
장: “나의 마지막 몇 년은 PF(퍼펙트패밀리 프로젝트)의 가장 신뢰할 만한 사람과 함께 나의 장례식과 만찬을 기획하고 준비할 시간이 될 듯하다.”(231쪽)
우리는 남에게 폐 끼치는 일을 너무 어려워하지만, 사실 서로 폐를 끼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사회라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정작 자신의 장례식은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 방식으로 준비하려 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어요.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과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 사이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을 것 같고요. 작가님은 그 간극을 어떻게 느끼고 계신가요?
박: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부탁하려고 하면 일단 ‘미안하다’는 생각부터 들어요. 머리로는 당연하게 도움을 주고받아도 된다는 걸 알지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는 건 또 다른 문제더라고요. 도움을 받는 것도 훈련이 필요한 것 같아요. 이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나한테도 이런 모순이 있었구나’ 싶네요.
저에게는 작품이 자식 같은 존재거든요. 제가 죽고 나면 이 작품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게 돼요. 그런데 아무한테나 그 일을 맡기는 건 조금 어려울 것 같고, 제 주변에 그걸 책임지고 도와줄 사람이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차라리 그런 일을 전문적으로 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제가 열심히 돈을 벌어서라도, 적어도 제가 만든 작품들이 그냥 폐기물이 되지 않고 새로운 주인을 찾게 하고 싶어요.
물론 그때가 되면 누군가 선뜻 도와줄 수도 있겠죠. 그러려면 저도 지금부터 조금씩 도움받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사실 생각해 보면 제가 아주 도움을 청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니긴 해요. 나름대로 말은 잘하고 다니는 편이에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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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북토크 내용은 위 영상을 통해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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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이든 독서모임이든, 어디서든 버티는 사람이 남고 남는 사람이 변화를 만든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변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달라 보인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내가 그랬듯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독서모임에 나간 거라고 말하게 된다.”
(『독서모임을 오래 한 사람에게 생기는 일』 김이경 지음, 유유)
지독하리만큼 무료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병원, 집, 병원, 집, 교회. 이런 일상 가운데서도 숨통이 쉬어지는 건 우리 동네 앞으로 ‘밥 먹자’, ‘커피 마시자’, ‘수다 떨자’며 꾸준히 연락하는 지우(知友)들 덕이다. 마음의 컨디션이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 어제와 오늘의 기분이 어쩜 이렇게 격차가 큰지 나조차도 놀라고 있는 요즘, 서로의 일상을 자주 나누는 J는 수시로 내게 묻는다. “밥 먹었어요?” J뿐만 아니다. 바쁜 와중에도 수시로 연락하고 또 밥 먹자며 동네로 선뜻 와주는 지우들 중에는 글쓰기 모임에서 만난 수강생이 여럿이다. 책으로 연결된 사람이어서일까, 글로 엮인 인연이라서일까. 그들의 우정과 사랑에 감탄하면서 나는 씩씩한 돌봄을 이어가는 중이다.
“책만 읽고 싶어요.” “글만 쓸래요.” “친밀해지는 건 NO. 부디 느슨한 관계만 만들어요.” 이런 요구가 많았던 한 모임을 기억한다. 자신의 가장 내밀한 이야기를 나눠놓고는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마세요’라니. 수업이 끝나면 쌩하니 가방을 둘러메고 강의실 문을 나서는 모습이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반면 ‘책이 곧 사람’, 사람 책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아는 사람들이 유독 많았던 모임이 있었다. 서로의 글을 읽다 독자가 되고, 친구가 되고, 이웃이 되었던 이들은 자신과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경청할 줄 알았다.
우리는 왜 책을 읽을까. 몰랐던 걸 알고 싶어서, 안 보였던 게 보였으면 해서 책을 읽는다. 우리는 왜 책을 ‘같이’ 읽을까. 혼자 읽었다면 놓쳤을 것들을 보기 위해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만나고 싶어서 함께 읽는다.
30년 동안 하나의 독서 모임을 이끌고 있는 김이경 작가는 “책에서 얻은 지식이 피가 되고 살이 되려면 결국 삶을 통과해야 한다.(86쪽)”고 말한다. 책으로 만난 인연들이 내 삶에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었는지, 이들로 인해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눈이 얼마나 넓어졌는지 새삼 돌아보는 요즘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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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SNS를 하다가 “가난하게 컸니?” 밈을 볼 때면 나는 아무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 생각 없는 행동에 가깝다. “애비 없이 자랐니?”라는 말이 너무나 적확한 사실이라 내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가난도 그렇다. 얼마나 가난했는지 1박 2일 정도는 안 쉬고 말할 수도 있다. 원한다면. 아무도 원하지 않겠지만. 가난하게 컸냐고? 네, 다음 질문 받습니다.
밈의 원본은 드라마 〈작은 아씨들〉(2022, tvN)의 대사다.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요? 참는 걸 잘하길래.” 몸에 밴 태도에서 가난을 읽는 현실적이고 서늘한 장면이었다. 말하는 이의 계급적 우월감과 무례함을 폭로하는 원작의 맥락은 사라진 채, 4년 사이 광범위한 상황과 불특정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밈’이 되었다. 웃자고 한 얘기에 죽자고 달려드는 눈치 없는 사람이 한 번 되어볼까. 나한테 타격이 없다는 것과 그 말이 아무에게나 해도 되는 말이라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가난이 웃기니?
물론 가난은 웃기다. 적어도 내 가난은 내가 웃기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실패를 반복하며 내가 경험한 가난에 들러붙은 결핍, 콤플렉스, 흑역사가 꽤 좋은 농담 소재라는 걸 알게 됐다. 남이 하면 무례한 말을 내가 먼저 해버릴 때 오는 묘한 쾌감은 덤이다. 불쌍한 사람이 되기 전에 웃긴 사람이 된다니, 1석2조 아닌가. ‘웃수저’에 대한 나의 오랜 동경에는 내 이야기에 대한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겠다는 다짐이 섞여 있다.
코미디언 장도연은 방송에서 여러 차례 자신의 목표를 “누구에게도 상처 주지 않는 개그”라고 했다. 나는 그 목표가 불가능해서 마음에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쓰는 것, 포기하지 않는 것, 끊임없이 살피고 고민하겠다는 다짐까지 나는 그 말 안에서 읽는다. 한편으로는 상처를 건드리면서 오히려 깊어지는 종류의 웃음도 있다는 걸 안다. 취약함이 농담이 될 때 우리는 친밀함을 확인하기도 한다. 농담은 상처를 없애주지 않는다. 대신 상처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서로를 만날 수 있게 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금개가 쓴 『적정 코미디 기술』(오월의봄, 2025)에는 “아슬아슬한 주제로 슬슬 열받게 놀린다”(93쪽)는 ‘로스팅’이라는 형식이 소개된다. 당연한 말이지만 로스팅은 꽤 어려운 기법이다. 금개에 따르면 누군가를 잘 놀리기 위해서는 관계 속 힘의 방향을 살펴야 한다. 상대가 무엇에는 웃을 수 있고 무엇에는 아직 웃을 수 없는지, 누가 누구를 향해 말하는지에 따라 같은 농담도 전혀 달라진다. 코미디는 선을 무시하는 기술이 아니다. 오히려 선의 위치를 끝없이 살피는 기술에 가깝다. 밈은 말은 옮기지만 관계까지 옮기지는 못한다. “가난한 집에서 자랐어요? 참는 걸 잘하길래”라는 대사에서 “가난하게 컸니?”만 남을 때, 선의 위치는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여전히 사람들을 웃기고 싶어서 초조해한다. 금개는 코미디를 “예술 장르라기보다는 인생의 태도”라고 정의한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을 얼마나 희극적으로 바라볼 것인가, 거리낌없이 말을 내뱉기 위해 혼자 고민하는 시간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천박하고 바보 같고 우스운 광대처럼 보여도 상관없을 정도로 스스로의 마음을 단련하는 일, 남을 웃기는 순수한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사랑하는 마음을 언제나 남겨두는 일”(12쪽)이 코미디다.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말은 내게 최고의 칭찬이다. 웃는 김에 넘어지고, 넘어진 김에 잠깐 쉬어가라는 의미가 담긴 말 아닌가? 가난했던 얘기를 하면서도 웃기고 싶고, 너무 슬픈 이야기나 망한 이야기를 하다가도 쓸데없이 웃기고 싶다. ‘사는 꼬락서니’란 같이 웃기고 자빠지는 일 안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고 믿는다.
가난이 내게 가르친 생존 기술일까? 슬픈 사람이 되는 것보다 웃긴 사람이 되는 편이 주변을 덜 곤란하게 한다는 사실을 나는 일찍 눈치챘다. 사람들이 웃을 때 나는 안심한다. “가난하게 컸니?”라는 질문에 나는 아마 앞으로도 별 저항 없이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네, 가난하게 컸습니다. 그다음 질문은 내가 하고 싶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까지 ‘같이’ 웃을 수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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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9월 불광문고의 문을 닫은 순간부터 다시 서점을 열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부터 당연히 서점을 계속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5년이나 걸릴 줄은 몰랐습니다. 가장 오래 고민한 것은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서점은 무엇인가’였습니다. 불광문고에서 23년간 일하면서 책을 파는 방법만 배운 것은 아닙니다. 어떤 책을 독자에게 권할 것인지, 서점이 지역에서 어떠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올해 7월 문을 연 수련점에서도 ‘책을 많이 갖춘 서점’보다는 ‘좋은 책을 잘 발견할 수 있는 서점’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책을 고를 때는 더 신중해졌습니다. 불광문고 대표님께서는 늘 ‘우연의 발견성’을 강조하셨습니다. 서점에 들어온 사람이 처음부터 찾으려고 했던 책이 아니더라도 서가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한 권의 책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25년간 은평구에서 큰 사랑을 받았던 불광문고를 많은 분들이 ‘치유의 공간’이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꼭 책을 사지 않더라도 잠시 머물 수 있고, 잠깐이라도 숨을 돌릴 수 있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고요. 불광문고에서 배운 것을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어가는 것이 수련점의 목표입니다.
저는 미적 감각이 별로 없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김출판사 김미선 대표님께 도움을 청했습니다. 대표님께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서점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면 디자인 부분을 도와드리겠다”고 선뜻 말씀해주셨거든요. 서점 이름을 짓는 데도 큰 도움을 받았습니다. 불광문고의 전통성을 이어가는 것이 좋겠다며 ‘불광문고 수련점’이라는 이름을 제안해주셨습니다. 2주 넘게 더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불광문고라는 이름에 누를 끼치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이 컸지만, 이 이름을 사용하는 순간부터 저에게는 하나의 책임이 생겼습니다. 불광문고라는 이름을 이어가는 만큼 좋은 책을 소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책임입니다.
올 여름에 수련점을 열고 가장 놀랐던 것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 불광문고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불광동에서 역말사거리까지는 교통이 편한 편이 아닌데도, 서점을 다시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일부러 찾아와 주시는 분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불광문고 대표님께서는 “불광문고에서 책을 읽던 아이들 가운데 작가가 되는 아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종종 하셨는데, 실제로 불광문고에서 책을 읽던 아이가 작가가 되어 찾아왔고, 철학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어 다시 찾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수련점에서는 21개의 주제를 중심으로 책을 분류하고 있습니다. 책을 고를 때는 먼저 그 주제에 적합한 책인지를 봅니다. 그리고 독자에게 권해도 될 만한 내용인지 살핍니다. 공간이 작기 때문에 오히려 한 권을 들이는 데 더 신중해졌습니다. 모든 책을 갖출 수는 없지만, 서점에 온 사람이 ‘이런 책도 있었구나’ 하고 새로운 책을 발견할 수 있도록 책을 고르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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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관 행사로 ‘신영복 선생님 10주기 추모 북토크’를 열었습니다. 70여 분이 참여했고 깜짝 공연도 펼쳐져 분위기가 무척 좋았습니다. 이날 행사에서 제가 한 일은 거의 없습니다. 행사 준비는 불광문고 대표님의 후배분들과 동기분들이 모두 해주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중에 얼마나 많은 분이 애써주셨는지 알게 됐습니다. 처음 다시 문을 연 서점에서 이런 행사를 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큰 응원이었습니다.
출판 시장과 동네서점의 환경은 갈수록 녹록하지 않습니다. 솔직히 지금이 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5년 전에도 인터넷서점과 대형서점의 영향으로 지역서점이 어려웠지만, 지금은 거대 유통 플랫폼까지 경쟁자로 들어왔습니다. 예전에는 신학기 참고서를 팔아 1년을 버틴다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이야기가 옛말이 된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도 다시 시작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고, 좋은 책을 소개하는 공간은 여전히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좋은 책 한 권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을 정말 많이 봤습니다. 그 경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크고 유명한 서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동네에 오래 남아서 “그곳에 가면 좋은 책이 있다”는 믿음을 주는 서점이면 좋겠습니다. 5년 동안 서점을 다시 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제는 이 서점이 얼마나 오래 살아남을 수 있을지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불광문고에서 배운 것들을 잊지 않고, 지금의 방식으로 오래 이어가고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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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깜짝 공지! 〈행간과 여백〉 구독자 파티를 엽니다!
안녕하세요, 구독자님들! 연 마케터입니다. 🐈
10월 9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파주페어 북앤컬쳐 북소리에서 〈행간과 여백〉 독자 여러분을 만납니다! 〈행간과 여백〉을 처음부터 함께 만들어 온 엄지혜 편집장, 연재 칼럼으로 매호 ‘여백’을 채워주시는 장일호 기자, 그리고 에디터인 연 마케터까지. 세 사람이 함께 작은 구독자 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요.
💌 이런 분을 초대합니다
- 〈행간과 여백〉 제작 비하인드가 궁금한 분 - 출판사 뉴스레터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분 - 책을 좋아하고 출판계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 퀴즈도 풀고(경품도 있어요! 🎁), 북페어를 즐기고 싶은 분 - 그냥 돌베개 북매거진을 사랑하는 분이라면 누구나!
거창한 자리는 아닙니다. 그동안 레터를 통해 만나온 독자분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뉴스레터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편안한 시간을 만들어보려고 해요. 혹시 “가고 싶지만 낯을 많이 가리는데…” 고민하고 계신 분들도 걱정하지 마세요. 내향인도 맘 편히 머물다 갈 수 있는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웰컴티와 다과도 준비해둘게요. ☕🍪 (저도 내향인이랍니다...)
📮 〈행간과 여백〉 구독자 파티 일시 2026년 10월 17일(토) 오후 4시 ~ 5시 30분 장소 ‘행간과 여백’ 카페 (경기 파주시 회동길 77-20 돌베개 사옥 1층)
인원 20명 (선착순 마감) 참가비 무료
대상 〈행간과 여백〉 구독자라면 누구나!
‘지혜의숲’에서는 쓰고, 다듬고, 만들고, 파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는 북마켓 ‘난장’도 펼쳐집니다. 선선한 가을날, 책을 좋아하는 마음 하나 들고 파주로 놀러 오세요. 10월 17일, ‘행간과 여백’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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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걸 보니, 가을이 성큼 다가온 것 같습니다. 🍂
이번 〈행간과 여백〉은 어떠셨나요? 어떤 이야기가 오래 마음에 남으셨는지 궁금합니다.
남겨주시는 소중한 피드백을 바탕으로, 다음 호도 조금 더 알차게 채워가겠습니다.
늘 함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_연 마케터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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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Book Magazine 〈행간과 여백〉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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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정지연
마케터 김영수, 고운성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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