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olbegae Book Letter
행간과 여백 _No. 9 / 250407
∥ Contents
- [사람들] 돌베개와 함께한 35년을 되돌아보며 / 심찬식 국장
- [엄지혜 에세이] 작가의 말들 #6 • 마음 둘 곳 없으면 도서관에라도 와 _황영미
- [바이북바이로컬] 책이 세상을 바꿔나간다고 믿습니다, 평산책방
- [북토크 리뷰] 좋은 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 엄지혜 X 최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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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와 함께한 35년을 되돌아보며,
"행복한 출판이었습니다."
35년에서 딱 한 달이 모자라네요. 1990년 2월부터 34년 11개월을 돌베개에서 일했습니다. 정년퇴직을 하면서 참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한 출판사에서 일하다 정년을 맞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돌베개는 참 좋은 회사였습니다. 굉장히 인간적이고 사람들을 인격적으로 대해주는 회사였죠. 노동운동을 같이 했던 친구들이 저를 무척 부러워했어요. 책이라는 지적인 활동을 하면서 일할 수 있는 환경이었으니까요.
1990년 출판 영업자로 돌베개에 입사했습니다. 돌베개가 1979년에 만들어졌으니, 11년이 지난 시점이네요. 그땐 직원이 10명이 채 안 됐습니다. 나름 돌베개 최초의 공채로 들어갔는데요.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2권이 나왔을 무렵입니다. 사회과학책들이 많이 읽히던 시절이었는데 이 책이 대학신입생 필독서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회사를 좀 확장하려던 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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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물리학과 출신이에요. 83학번인데 학생운동을 하면서 전공 공부를 아예 못했습니다. 물리학을 접고 사회운동 쪽에 관심을 갖고 있는데 학교 선배가 돌베개라는 출판사에서 영업 담당자를 뽑는다고 해서 면접을 봤어요. 편집자 두 명과 제가 들어갔죠. 그 전에는 수학, 영어학습지에서 잠깐 일했어요. 서울 마포구 망원동, 지금의 마포구청역 근처에 사무실이 있었던 시절인데 스마트폰도 삐삐도 없었죠. 오전에는 시내서점에 출고할 책을 포장했고, 오후에는 대학가의 사회과학서점에 나가 제고를 체크하고 빠진 책을 주문했습니다. 제 영업 선배들은 포장한 책을 버스로 광화문 논장서점에 가져와 서울대 방향, 연대 방향, 고대 방향끼리 나눠서 배본했다고 하던데, 저는 다행이 민중사라는 전문배본업체가 생겨서 그런 수고를 덜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신간이 나오면 150곳의 서점에 나갈 신간을 포장해야 했는데요. 특히 지방서점용은 서부역, 용산역에서 직접 철도화물로 배송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은 영업자의 주요 업무가 마케터 역할이잖아요. 그때는 마케팅 개념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편집과 영업 정도만 나눠서 일했죠. 돌베개는 인문사회과학 도서를 많이 내는 출판사니까 사회과학서점의 비중이 높았습니다. 서울에 있는 대학 앞에는 지금의 독립서점처럼 당연히 사회과학서점이 있던 시절이었죠. 현재 남아있는 서점은 서울대학교 녹두거리 앞에 ‘그날이오면’이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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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의 터닝포인트는 『백범일지』였던 것 같아요. 이 책이 2003년 MBC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에 선정된 후 엄청 팔렸거든요. 이 책은 꼭 읽어야 하는 책이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에요. 당시 황석영의 『모랫말 아이들』과 함께 선정돼서 독자가 분산되는 영향이 있었지만, 뒷심이 좋았어요. 방송이 나간 8월은 『모랫말 아이들』에 밀렸지만 그 후 한 달 정도 종합 1위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이후로도 고 신영복 선생님을 비롯해 유시민 작가님 책들이 꾸준히 사랑 받았죠. 2014년에 『나의 한국현대사』가 출간됐고 2015년 『담론』, 2018년 『역사의 역사』 등 꾸준히 베스트셀러가 나오면서 돌베개의 정체성이 더 탄탄해졌습니다.
저의 돌베개 인생책은 신영복 선생님의 『감옥으로부터 사색』이에요. 제가 학생운동을 하던 시절에는 다들 1,2년 정도는 감옥에 들어가곤 했거든요.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들어가서 1987년 유월항쟁으로 나왔는데 1988년에 초판이 나왔던 『감옥으로부터 사색』이 큰 감동을 주었고, 1998년 개정판이 돌베개에서 다시 출간됐을 때 그렇게나 반갑고 좋았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책을 우리가 낼 수 있다는 게 너무 좋았죠. 책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선생님을 종종 뵐 수 있었던 것도 돌베개에서 일하는 특별한 보람 중 하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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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시장이 다시 활기를 띨 수 있길 바랍니다. 제가 생각하기엔 가정, 학교, 지역 등 단위 별로 책을 읽고 토론하는 문화가 점점 더 많아져야 해요. 개별적으로 책을 읽는 건 한계가 있어요. 요즘은 모든 걸 유튜브로 정보를 검색하는 시대니까요. 어느 정도 강제성을 갖고 책을 읽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교양서 신간이 나오면 큰 도서관들의 경우에는 무조건 책을 구입했는데, 요즘은 또 그렇지 않아요. 도시에 거점이 되는 도서관 외에는 상호 대차 서비스를 하니까, 도서관의 신간 구매 비율이 확 줄었어요. 국가적으로도 지자체에서도 책 읽는 문화를 함께 만들어가면 좋겠어요.
지금까지 그래왔듯, 앞으로도 돌베개가 시대와 함께하는 단단한 인문책을 만들어나갈 것을 믿어요. 독자분들도 신뢰하시고 끝까지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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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찬식X돌베개 | 1990. 2. 11 - 2024. 12. 3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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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둘 곳 없으면 도서관에라도 와.
네 편이 되어 줄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
작가는 넘치는 사랑을 글로 표현하는 사람이야.
세상 사람들을 일일이 다 만나서 사랑할 수 없으니 글로 마음을 표현하는 거지.
쉽게 좌절하지 말라고. 너의 인생을 사랑하라고.”
토요일 오전 10시, 도서관에 가는 날이다. 초등학생 아들이 도서관 드론 수업을 신청한 덕분에 독서할 의무가 주어졌다. 아이의 수업 시간은 1시간 40분. 나에게 허락된 자유 시간도 동일하다. 여전히 학습만화를 더 선호하는 아이가 부탁한 『실험왕』, 『로봇왕』, 『발명왕』 시리즈를 대출할 수 있는 최대 권수로 빌려 놓고, 열람실 끄트머리 의자에 앉는다.사놓고 읽지 못한 책을 두 권 갖고 왔는데, 굳이 노트북까지 챙겨와서 이어폰을 꽂고 ‘넷플릭스’에 접속할까 말까 망설인다. ‘어제 <폭싹 속았수다>를 보다 말았는데 <하트 페어링>도 보고 싶은데, <협상의 기술>도 그렇게나 재밌다던데.’ 하지만 이 소중한 시간에 영상을 보면서 시간을 때우긴 아깝다. 서둘러 도서관 신착 도서 코너로 향한다.
‘세상에는 참 많은 책이 있네, 이런 책을 과연 누가 읽지, 왜 성인 그림책, 그래픽노블은 여전히 도서관에서 찾기 힘든가.’ 갖가지 상념에 사로잡혀 책을 구경하다 시계를 보니 벌써 30분이 지났다. 헐레벌떡 자리에 앉아, 일주일 내내 가방에만 넣고 다닌 채 석장도 읽지 못한 책을 꺼내 든다.
도서관의 차분한 공기는 나의 신경안경제. 홀로 망상에 사로잡히든 구차한 이야기를 끄적거리든 무엇이라도 허락되는 공간.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혼자 있는 게 당연한. 어쩌면 도서관은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적인 공간 중에 가장 고요하고 무해한 장소가 아닐까.
시간이 잠깐만 멈춰버리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찰나,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여학생이 옆자리에 앉더니 노트를 하나 펼친다. 공부하러 오는 학생들만 봤지 소설을 읽는 학생도, 편지를 쓰는 학생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한 마음에 곁눈질을 시작한다. 여학생은 뭔가를 끄적거린다. 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살살 꼬면서. 편지를 쓰나? 고민이 있나? 얼굴을 한참 찡그리더니 문학 코너로 가서 시집 한 권을 갖고 와서 필사를 하기 시작한다. 시집 제목이 너무 궁금했지만 엿보기에 실패. 다시 책에 집중하려는데, 내 시선을 의식한 학생이 책상에 얼굴을 파묻더니 훌쩍이기 시작한다. 아뿔싸. 인생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는가 보다. 초콜릿이라도 있으면 넌지시 주고 오는데 아쉽게도 주머니가 텅 비어 있다.
학생은 도서관 소설집 『더 이상 도토리는 없다』를 읽었을까. “마음 둘 곳 없으면 도서관에라도” 오라는 작가의 이야기를 혹시 읽은 걸까. “수업이 끝났다”는 아이의 전화를 받고 열람실을 총총 나서며, 마음속으로 “파이팅”을 외쳐본다. “네 편이 되어 줄 많은 이야기”를 찾길 응원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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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uy Book, Buy Local
책이 세상을 바꿔나간다고 믿습니다
_신훈정 평산책방 사무처장(@pyeongsanbooks)
경남 양산시 하북면에 자리한 ‘평산책방’. 혹시 방문하신 적이 있나요? 인기 영업사원 ‘다봉이’와 ‘만복이’가 반겨주는 평산책방이 오는 4월 25일, 2주년을 맞습니다. 평산책방의 살림꾼 신훈정 사무처장이 그간의 소회를 전해왔습니다.
평산책방이 2주년이라니, 사실 시간이 4-5년은 흐른 듯합니다. 평산마을 주민이 살던 집을 구입해 리모델링하고 문을 연 게 2023년 4월입니다. 지난 시간들이 녹록하지만은 않았지만 돌이켜 보면 책방에서의 경험들은 모두 값진 공부였습니다.
평산책방이 자리잡은 양산의 하북면은 참 멋진 곳입니다. 책방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우리나라 3대 사찰의 하나인 통도사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있어 불보사찰이라고도 하죠. 통도사 입구부터 이어진 소나무가 춤을 추는듯한 무풍한송로를 걷고, 통도사 경내와 서운암, 장경각, 자장암 등 19암자를 방문해 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자장암 인근에 조성된 보리밭과 호수도 장관이니 통도사와 일대를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부족합니다.
책방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때, 저희에겐 원칙이 하나 있었습니다. 책방과 마을이 조화로울 수 있도록 최대한 기존의 공간을 유지하는 일이었습니다. 책방 내부는 서점이라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벽을 트고 다락방을 없애는 등 구조를 바꿨지만, 외형은 기존의 주택 그대로입니다. 마당의 나무들도 원래 있던 자리를 지키고 있고요. 책방 앞 돌벤치에 앉아 만복재의 우거진 소나무 숲을 바라보며 풍경 소리를 들으면, “너무 좋다”는 말이 절로 나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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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책방에는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영업사원 ‘다봉이’가 있습니다. 제주도가 고향인 다봉이는 눈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나 버려졌던 고양이입니다. 구조 후 인연이 닿아 책방에서 거주하며 근무하게 되었죠. 책방 카페에서 판매하는 ‘다봉이라떼’도 인기 만점입니다. 둘째 고양이 ‘만복이’는 평산마을 길냥이의 새끼인데 어느 날부터인가 스스로 책방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두 친구는 책방에 오시는 모든 분들께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평산책방에는 시인도 근무하고 계십니다. 언뜻 보면 농부아저씨 같지만 유명한 시인이신 박성우 이사님은 재단의 전반적인 운영을 총괄하십니다. 평산책방의 수익금은 모두 책 읽는 문화의 확산을 위한 공익사업에 사용되는데요. 공익사업을 기획, 홍보, 운영하고 북클럽 ‘책친구’, 후원, 회계 관련 업무를 사무처 직원들이 맡고 있습니다. 또 팔순이 넘으셨으나 늘 화장을 하고 꽃무늬 옷을 즐겨 입으시는 멋쟁이 마을 어르신이 책방의 깨끗한 환경을 책임져주시고 계십니다.
평산책방 추천 책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눕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님이 2012년부터 꾸준히 SNS에서 책 추천을 하고 계시고요. 평산책방 도서선정위원회에서 매달 추천 글과 함께 3~4권의 책을 추천합니다. 가족 단위 방문객들이 많다 보니 그림책, 어린이책 추천을 매달 포함하는 편이고 시, 소설, 인문 등 다양한 분야의 책을 골고루 선정합니다. 평산책방만의 큐레이션 ‘내일로 가는 책’에서는 인류의 지속과 번영을 위한 UN의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17가지 목표를 기반으로 평등과 경제, 기후/생태/,협력과 공존 네 가지 분야의 책을 추천합니다. 또 2025년에는 전국의 50개 동네책방과 추천 책을 분기별로 전시하고 판매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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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을 열고 가장 많은 방문객이 오셨을 때는 2023년 5월입니다. 한 달간 37,803명이 방문해 주셨습니다. 이미 아시겠지만 평산책방은 매월 방문객 수와 판매된 도서 수량을 공개합니다. 처음에는 동네책방들의 원성을 듣기도 했습니다. 다른 책방들은 하루에 한두 권도 안 팔리는 날이 있는데 평산책방의 수치를 보면 위화감이 든다고들 하셨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숫자를 공개하는 이유는 꾸준히 방문해주시는 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는 뜻이기도 하고, 판매 수익금을 책 읽는 사회를 위해 정직하게 사용하겠다는 다짐과도 같습니다.
독서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사업은 2025년에도 이어갑니다. 독서모임리더양성 아카데미, 도서 기증 '찾아가는 평산책방' 등 책 생태계를 위해 공익사업을 진행했는데요. 올해도 아쉬웠던 부분을 보완하며 사업들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돌베개와 평산책방의 인연은 고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이 시작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재인 전 대통령님이 2016년에 이 책을 추천하시면서 “되도록 느리게 느리게 읽고, 봐야 하는 책”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우공이산(愚公移山)' 과 ’춘풍추상(春風秋霜)‘을 통해 노무현 전 대통령님과 신영복 선생님과의 기억도 떠올려주셨고요. 책 속 모든 이야기가 이 시대의 아픔, 희망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젊은 세대를 살고 있는 분들이 더 많이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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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고 판매하고 읽는 사람들은 그들만의 향기가 있습니다. 점점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지만, 책에는 강한 힘이 있고 결국 책이 세상을 바꿔나간다고 믿습니다. 엄혹한 시기를 잘 견디려면 공동체가 함께 책을 나눠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산책방도 지역서점으로서의 역할을 잘 해낼 수 있도록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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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_엄지혜 X 최혜진(@writer.choihyejin)
지난 3월 28일 서울 종로구에 자리한 '북살롱 오티움(@booksalon.otium)'에서 『글쓰기 생각쓰기』 북 토크가 열렸습니다. “어떻게 써야 독자를 만들 수 있을까?”라는 주제로 마련된 행사였는데요. 개정판이 출간되자마자 큰 사랑을 받은 책인 만큼 많은 독자들께서 참석해주셨습니다. 최혜진 작가와 함께한 현장 이야기를 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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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를 쓴 자격으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다.
(웃음) 평범하지 않은 행사죠. 모더레이터가 엄지혜 작가님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흔쾌히 참석했는데요. 추천사 청탁을 받았을 때가 내년에 나올 단행본 작업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글쓰기 생각쓰기』의 첫 꼭지에서 완전 위로 받고 말았어요. “글 쓰는 사람도 천차만별이고 글 쓰는 방법도 천차만별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할 수 있게 해주는 방법이라면 무엇이든 그 사람에게 옳은 방법이다.(26쪽)” 이 문장을 읽고, ‘말하고 싶다’는 열정이 있다면 쓸 수 있다는 믿음이 생기더라고요. ‘쓰고 싶다’는 마음을 먹게 해주는 책, 나아가 ‘쓸 수 있겠다’는 마음까지 먹게 하는 책은 정말 드물고 소중해요. 추천사를 쓸 수 있겠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글쓰기 생각쓰기』의 가장 큰 매력은 무엇이었나요?
글 쓰는 마음가짐에 대해 끊임없이 속삭이기 때문이에요. 저는 특정한 주파수, 특정한 모드로 접속해야만 글이 써지더라고요. 돋보기로 햇빛을 끌어 모아 한 곳을 지긋하게 쬐어 연기가 피어 오를 때까지 기다리는 것처럼, 어두컴컴한 의식 한 귀퉁이를 끈질기게 노려볼 수 있는 정신적 체력이 필요하거든요. 생각의 호흡이 가쁠 땐, 회사 업무에 필요한 쓰는 기획안이나 카피 등 실용적 글쓰기는 할 수 있어도 ‘인간미와 온기’를 담는 단행본 원고는 쓸 수 없어요. 그래서 ‘글이 써지는 정신 상태로 입장’한다는 표현을 추천사에 넣게 되었어요. 주5일 출근해서 현생에 찌들어 가면서 제 안의 작가 페르소나가 잔뜩 구겨지고 때묻었다고 느낄 때였는데, 그럼에도 이 책을 펼쳐 보고 몇 줄 읽으니 무릎에 힘이 들어가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고요.
각별히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었나요?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 쓰려면, 먼저 남들보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이 있어야 한다. (357쪽)” 책을 읽을 당시엔 ‘내가 욕심을 덜 내서 글을 잘 못 쓰는 것’이라고 자책하게 된 문장이기도 한데요. (웃음) 저는 글쓰기에 대한 욕심(동경)에 타올랐다가 반대급부로 ‘나처럼 실력 없는 자가 무슨 글을 쓴다고…’ 하는 자괴감에 빠진 20대 시절의 경험이 있어요. 이 문장이 나온 꼭지의 소제목은 “최선을 다해 쓰자”예요. 저도 이 문장에는 동의해요. 하지만 “최선을 다해 쓰자”고 생각하면서 굳이 ‘남들보다 잘’이라는 비교형으로 생각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어요. 세상에 글 잘 쓰는 사람이 너무 많고요. 남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냥 ‘저 사람은 저 사람의 이야기를 참 멋지게 하는구나. 부럽지만 어떻게 해. 나는 저 사람이 아닌데.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최선을 다해서 하자’ 정도도 괜찮은 마음가짐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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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리어답터시죠? 챗GPT를 잘 사용하실 듯한데, AI글쓰기의 가능성은 어떻게 보시나요?
회사에서 업무를 볼 때 AI를 아주 유용하게 쓰고 있습니다. 저는 디렉터로 연마된 사람이기 때문에 AI도 디렉팅을 꽤 잘 하는 편 같아요. (웃음) 요즘 같은 ‘대생성의 시대’에는 갈수록 알아보는 눈이 중요해질 것 같아요. 특히 진부함을 알아보는 눈이요. AI가 만들어낸 콘텐츠는 겉으로 보기엔 매끄럽고 그럴듯하지만, 무난한 생각이 반복 생성되는 경우가 많아요. 생성형 AI는 확률 기계거든요. A라는 단어 뒤에 나올 수 있는 수많은 단어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은 것을 호출해주는 식으로 글을 써요. A라는 단어 뒤에 나왔을 때 대다수의 사람이 호응할 단어 B를 쓰자! 이렇게요. 그 문장이 어떨까요? 보편적이고 무난할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해요.
이걸 역으로 생각하면 저는 ‘자기를 드러낼 용기가 없을 때, 미움 받을 용기가 없을 때’ 진부한 글을 쓰게 될 위험이 높아진다고 생각해요. AI 도움을 받아서 만들어진 무난한 글이 더욱 더 범람할 것이기 때문에 ‘데이터화 할 수 없는 것’의 가치가 점점 더 높아지리라 생각하는데요. 그래서 내 느낌, 감정, 기억을 평가절하 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해요. AI가 생성해 낼 수 없는 영역이 뭘까? 하는 질문을 해보면 답이 금세 나오지 않을까요?
더불어 사람들이 점점 다지선다형 사고에 길들여질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요. AI 시대에는 질문을 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들 하잖아요? AI에게 무엇을 어떻게 물어야 좋은 답을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경쟁력이 있다고 하죠. 그런데 이제는 AI가 질문까지 대신 만들어주는 시대가 됐더라고요. 사용자가 질문창에 ‘글쓰기’라고 입력하기만 해도 AI가 “글쓰기의 어떤 점이 궁금해? 이거야? 저거야?” 하며 메뉴판처럼 선택지를 쭉 제시해 줘요. 혼자 고민하지 말고 주어진 보기 중에서 선택해 생각을 발전시키라는 듯이요.
그런데 제가 정말 두려운 건 이렇게 정해진 선택지 안에서만 사고하는 방식에 익숙해지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조차 스스로 인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이에요. 누군가가 보기로 제시해 주지 않는 한 스스로 궁금증조차 떠올리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죠. 이것이야말로 사고의 종속 상태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AI의 발전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습니다.
추상적인 질문이지만, 어떤 글이 좋은 글이라고 생각하세요?
관점이 정확하고, 호소력 있는 글이라고 답하고 싶어요. 저는 지적인 글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논리나 정확성만으로는 호소력이 생기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마음에 와 닿고 강한 인상을 남기는 글을 쓰려면 결국 자신만의 생각, 관점, 경험담을 담아야 하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작가가 미리 결론을 내려버리고, 독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방식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생각을 재료로 삼되, 독자가 스스로 느끼고 깨달을 수 있도록 표현을 다듬는 것이 호소력 있는 글의 핵심이 아닐까 싶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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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북:레터 〈행간과 여백〉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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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고운성
마케팅 김영수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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