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는 글
마음을 쿵 하게 만든 문장
취미가 하나 있습니다. 작가들의 인터뷰 답변을 오래 곱씹어보는 일입니다. 작가들의 인터뷰를 읽다 보면 한 편의 칼럼, 에세이를 읽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요. 『녹색 광선』 강석희 소설가의 답을 읽다가 오랜만에 마음 한구석에서 ‘쿵’ 소리가 났습니다. “요즘은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을 최대한 오래 응시하고 그것이 공분할 만한 일이라면 ‘분노를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으로 쓰려고 합니다.” 분노, 응시, 공분, 절제. 이 네 단어를 읽는데 왜인지 위로가 됐습니다. 이 마음을 닮고 싶어졌고요.
<돌베개 북 매거진> No.15 ‘행간’에서는 섭식 장애를 앓는 주인공 ‘연주’와 지체 장애를 가진 이모 ‘윤재’의 이야기를 그린 『녹색 광선』 강석희 소설가 인터뷰와 『녹색 광선』에 아름다운 일러스트를 그려주신 휘리 작가의 표지 리뷰, 한글날을 맞아 출간된 『한글 연대기』 이경아 편집자의 후기를 전합니다. ‘여백’에서는 장일호 <시사IN> 기자의 사회에서 만나는 ‘죽음’에 관한 시선, 정지연 마케터의 지역 서점 출장기, 곧 10주년을 맞는 파주 쩜오책방의 유쾌한 생존기를 담았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구독자 분들께 미션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행간’ 혹은 ‘여백’에서 마음을 쿵 하게 만드는 문장을 발견하셨다면, 꼭 한 번 기록해보는 일. 해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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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게 만드는 책.” 강석희 작가의 신작 소설 『녹색 광선』을 읽고 나서 후유증이 꽤 길었습니다. 곱씹고 싶은 이야기가 무척 많았거든요.
이 소설은 단편에서 출발한 작품입니다. 돌봄의 다양한 형태를 다룬 앤솔러지 『너의 오른발은 어디로 가니』에 수록된 단편 「녹색 광선」의 등장인물들을 데려와 장편을 완성했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강석희 작가는 “인물들이 오랫동안 굳게 입을 다물고 대화를 거부하는 듯했다”고 밝혔습니다. 왜일까요? 작가에게 물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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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쓰며,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던졌던 질문이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전작들을 쓸 때도 그랬지만, 『녹색 광선』을 쓰는 동안에는 이 이야기를 쓸 ‘자격’에 대해 자주 질문했던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에 남긴 세 개의 질문은 소설에 담고자 한 메시지와 연결되겠지요. 하지만 그 질문들을 제 몫으로 여기고 소설을 쓰려면 결국 이 문제에 대해 발화할 자격이 있는지 끝없이 고민해야 했습니다. 저는 연주와 윤재를 둘러싼 문제의 당사자였던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장애인 돌봄을 수행하는 당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닌 이와 혼인을 했고, 섭식 장애를 포함한 여러 문제를 겪는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지만 이 문제들에 대해 깊이 알고자 하고 더 고민하고자 한 건 이 소설을 쓰기로 한 다음이었어요. 소설을 완성하고 출간하는 동안 사안들에 대한 이해 정도는 나아졌고 그 부분은 다행이라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고민됩니다. 제가 이 이야기의 작가로서 최선의 자격을 지닌 사람인가에 대해서요.
소설의 끝을 향해 달려가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이 소설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정말 많은 작품이구나. 장애, 돌봄, 사랑, 가족, 우정, 관계…” 하나도 허투루 다루지 않으면서, 모든 걸 연결시키는 걸 보고 “사람의 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모두 담아낸 소설”이라고 생각했어요.
『녹색 광선』은 지금까지 쓴 소설 중 저의 삶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이야기였습니다. 소설을 관통하는 ‘돌봄’은 모든 이의 인생 전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겠으나 연주와 윤재가 주요 인물이 된 이상, 제게는 그들의 삶과 마음이 까만 밤을 불빛 없이 헤매는 심정의 연구와 탐구 과정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소설을 쓰는 동안 제가 모르는 것을 모르는 채로 두어 누군가 마음을 다치는 일이 없길 바라며 불안했고, 그 불안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그래서 그 어느 때보다 느린 속도로, 꿈속에서 두리번거리는 느낌으로 완성했던 소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제가 쓴 것 같지 않은 장면이나 문장들을 만나게 된 건 귀한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
53쪽에서 주인공 연주는 ‘완벽한 형태의 검은 돌’을 갖고 싶다고 말하지요. “과묵하고 묵직할 것, 손에 쥐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질 것.”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니, 아 나에게도 이런 돌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왜 작가님은 수많은 사물 중에 ‘돌’을 떠올렸을까 궁금했어요.
‘반려돌’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었어요. 연주와 마찬가지로 동물들에게 거부당하는 일생을 살아온 저로서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뒤로 물가에 가면 예쁜 돌을 찾는 습관이 생기기도 했고 아이의 친구들에게 선물하라고 어린이집 가방에 넣어주기도 했어요. ‘반려돌’의 매력은 말이 없고 휴대가 용이하다는 점, 그리고 볼 때마다 새롭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연주에게 꼭 필요한 무언가 같이 보였고요. 묵묵의 색깔이 검은 색이었던 건, ‘녹색 광선’(빛)의 역설로 이해해 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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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에 ‘참고 도서’ 리스트가 있는 경우가 그리 흔하진 않지요. 이 작품이 탄생하기까지의 고민이 읽혔는데요. 특별히 도움을 많이 받았던 책을 한두 권 꼽아주신다면요.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차열음, 창비)와 『출근길 지하철』(박경석, 정창조, 위즈덤하우스)를 말씀 드리고 싶어요. 『열네 살 우울이 찾아왔다』는 섭식 장애에 대한 자료 조사 과정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이었고 감정적 충격이 컸던 터라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연주라는 인물을 구축하는 데 있어 영화 <두 사람을 위한 식탁>과 가장 많은 도움을 준 책이었어요. 『출근길 지하철』은 장편으로 개고하는 과정에서 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대한 탐구를 위해 읽었습니다. 필요한 부분에 대한 이해에도 도움을 받았지만 비장애인으로서의 제 삶과 이 소설을 쓰는 일 자체에 대한 총체적 반성도 하게 된 책이었고요. 이와 더불어 퇴고 중에 읽은 『우는 나와 우는 우는』(하은빈, 동녘)도 꼭 읽어 보시길 권합니다.
국어 교사로 또 소설가로 살아가고 계시지요. 두 직업은 서로의 일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나요?
그렇습니다. 다만 제가 ‘교사’이기에 ‘청소년’ 문학 작업을 자주 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때때로 교사이기에 학생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소설을 쓴다고 감상을 전해주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 감사하면서도 부끄럽습니다. 교사로서의 저는 대부분의 시간에 일정 양의 직무를 아등바등 수행하는 직업인에 가깝고요, 당연히 학생들과 감정을 섞고 울고 웃을 때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거든요. 하지만 학교에서 학생들을 매일 만나는 일은 저라는 사람에게 좋은 마음을 갖게 하고, 세계의 총체적인 상을 그려보고 고민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교육이라는 행위는 사회의 모든 부분과 맞닿아 있으니까요.
『녹색 광선』을 읽은 독자들에게 질문을 하나 건넨다면요.
“연주와 윤재를 사랑하게 되셨나요?”라는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연주와 윤재의 이야기를 쓰면서 이 인물들이 독자들에게 끝내 사랑 받는 존재가 되길 바랐기 때문입니다. 미운 행동도, 쉬이 이해가 가지 않는 선택도 자주 하는 두 사람이지만 그들이 안고 사는 결핍과 그늘에 짓눌리지 않는 모습을 좋아해 주셨으면 해요. 결국 둘의 아픔에 대해 말하려면 우리 모두가 공모자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우리 각자의 아픔을 직면해야만 할 거라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연주와 윤재에 대한 사랑이, 이 책을 읽어주신 독자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면 작가로서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앞으로 어떤 작품을 쓰고 싶나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쓰면 어떨까, 어떻게 하면 이런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 수 있을까, 정도의 고민은 자주 하지만 방향성을 결정하는 ‘어떤’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은 잘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저 요즘은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일’을 최대한 오래 응시하고 그것이 공분할 만한 일이라면 ‘분노를 최대한 절제’하는 방식으로 쓰려고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언제 또 바뀌어 다른 방식으로 소설을 쓸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의 저는 그런 이야기를 쓰고 보여드리려고 해요. 다음 소설도 그러한 맥락에서 쓰게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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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휘리 작가 (@wheeleepainting)
『녹색광선』의 표지를 처음 의뢰받을 때, 출판사의 요청은 단 하나였습니다. 주인공 연주가 섭식 장애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갖게 한 길고양이 ‘밤이’가 그림에 담기면 좋겠다는 것이었어요. 연주에게 중요한 사람도, 물건도 많아 무엇을 함께 그려야 할지 고민이 깊었습니다. 이모와 휠체어, 혜영, 다해, 정연, 묵묵, 트래핑, 함께 걷던 채운사 산책길까지… 모든 것이 중요해 보였습니다. 각자 다른 몫을 가지고 주인공을 돕고 있는 것 같았거든요. 고민을 안고 ‘밤이’를 종이 한가운데에 그렸습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주변 이미지가 그려졌고, 소설의 마지막 대사가 떠올랐습니다.
“‘찾았다!’ 묵묵의 목소리였다.” (173쪽)
“밤과 숲의 빛을 머금은 묵묵”의 묘사를 떠올리며 빛과 어둠이 대비되는 배경에, 마지막 대사 ‘찾았다!’의 인상을 남겨줄 어떤 그림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녹색광선』이라는 제목이 주는 직관적인 느낌이 담기길 바랐습니다. 밤이 아래로 지나가는 짙고 기다란 초록 선을 그리며 했던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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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그림으로 재현할 때 부담스러운 일 중 하나가 소설 속 인물을 그리는 것입니다. 독자들이 각자 다른 주인공의 모습을 상상할 텐데, 그림이 독자의 상상을 방해할까 두려운 것이지요. 그럼에도 주인공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습니다. 그리되, 판단되지 않는 방식으로. 섭식 장애가 있는 주인공이 마른 체형이어서 예뻐 보이지도, 초라해 보이지도 않도록 그리며 연주의 말을 떠올렸습니다.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누구도 나를 비난하지 않았다.” (160쪽)
『녹색광선』에서 약한 것이 약한 것을 지켜내는 순간을 보았습니다. 책장을 덮으며 세상을 사랑하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일었고요. 이야기가 끝난 뒤의 안도감, 서로의 아픔을 품을 때 비로소 단단해지는 마음을 그림으로 담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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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석희 장편소설 《녹색 광선》 플레이리스트
강석희 작가가 《녹색 광선》을 쓰면서 듣던 음악을 독자님과 공유합니다.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녹색 광선》을 함께 읽어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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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한글 연대기』 이경아 편집자 (@griumnim)
『한글 연대기』를 처음 기획하게 된 것은, 한글 사전의 역사나 훈민정음의 탄생을 정리한 책은 많지만 정작 ‘한글 그 자체의 역사’를 탄생부터 현재의 모습까지 온전히 따라간 책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습니다. 백성을 위한 문자로 태어났지만, 오랫동안 조선의 문자는 한자였죠. 그 한자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주류에서 물러나고 한글이 우리말 우리글이 되었는지, 그리고 한글이 쓰이고 변화하는 맥락 속에서 우리는 한글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해 왔는지를 한 권의 책으로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주제로 쓸 수 있는 역량 있는 필자를 찾기 위해 관련 주제 논문들을 검색했고, 최경봉 교수님께 집필을 의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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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돌베개에서 2022년에 개정증보판으로 출간된 노마 히데키 교수의 『한글의 탄생』은 한글의 탄생 과정을 언어학적으로 재현하고, 한글의 미적 형태의 발전까지 한글이라는 존재를 입체적으로 살펴본 책입니다. 반면에 이 책은 한글이 이 땅에서 쓰이고 변하여 오늘의 ‘우리말’이 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따라간 역사 기록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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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3년에 세종이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1894년에 고종이 공문서를 한글로 쓰도록 칙령을 내리기까지 약 450년의 시간 동안 우리의 문자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리고 일본어에 ‘국어’의 자리를 빼앗긴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재까지 어떤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금의 한글이 되었을까. 이 과정은 단순하게 시간순으로 끊어 보여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한글 신문의 등장, 맞춤법 논쟁, 외래어 표기법 문제, 사전 편찬, 점자와 특수문자 발명 등 주제별로 우리의 한글이 어떤 궤적을 밟아 왔는지를 입체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원고를 읽으며 인상 깊었던 대목은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의 의도가 시간이 지나면서 뒤집히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세종은 백성을 교화하기 위해 훈민(訓民)의 글자를 만들었지만, 백성은 그 문자를 이용해 오히려 위정자를 비판하고 자신의 뜻을 펼쳤습니다. 연산군 시절 관리의 폭정을 규탄하는 한글 벽보가 한양에 붙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권력 유지의 도구로 창제된 문자가 민초의 무기가 되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한글을 바라보는 시각을 근본부터 흔들어 놓습니다.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지요.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또한 ‘언문’이라 불리며 얕보았던 문자가 일제강점기를 지나 ‘한글’이라는 이름을 얻는 과정은 문자 그 이상의 의미를 띱니다. 빼앗긴 나라에서 한글은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니라 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문자와 말, 언어와 민족이 분리될 수 없었던 역사적 경험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각인되어 있다는 점이 마음에 남습니다.
이러한 과정을 ‘어문민족주의’라고도 부릅니다만, 사전을 만들고 맞춤법을 세우며, 세계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다는 신념으로 한글을 가꾸어 온 노력들 뒤에는 외세에 맞서 ‘우리’를 지켜 온 치열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은 단순히 ‘문자의 역사’가 아니라 ‘투쟁의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인도네시아 사례는 우리 시대의 ‘민주주의 언어로서의 한글’을 새삼 일깨워줍니다. 반정부 시위에서 현지 청년들이 SNS 검열을 피해 자기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며 소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백성들이 훈민정음을 들고 위정자를 비판하던 조선의 풍경이, 21세기 인도네시아에서 다시 나타난 셈이죠. 문자와 권력, 언어와 자유의 관계는 뜻밖의 장소에서 조우하며 새로운 장면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이번 책을 만들며, 문자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깨닫습니다. 문자에는 권력이 있고, 역사와 감정이 있고, 때로는 목숨을 건 투쟁의 기억이 있습니다. 『한글 연대기』는 그 역사의 긴 흐름을 꿰어 낸 기록이자,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한글을 쓰고 지켜 나가야 할까, 물음을 던지는 책입니다.
편집자로서 이 책을 한글날에 맞추어 독자에게 선보일 수 있다는 것은 큰 행운이자 기쁨입니다. 『한글 연대기』를 함께 읽으며, 우리가 쓰는 이 언어와 문자가 지닌 무게를 다시금 느껴 보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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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부디, 죽음을 이야기하세요
자살이 암을 제쳤다. 통계청이 지난 9월 25일 발표한 ‘2024년 사망원인통계 결과’에 따르면 10대부터 40대까지 사망 원인 1위가 모두 자살이다. 특히 40대 사망 원인 1위가 암(24.5%)이 아닌 자살(26.0%)로 바뀐 것은 관련 통계를 작성한 1983년 이후 처음이다. 전체 자살률도 13년 만에 최대치였다. 여러 언론이 ‘국가 경제를 떠받치는 허리 세대’를 위협하는 40대 자살을 사회적 재난으로 보도했다. 주요 원인은 ‘생계 곤란’으로 꼽혔다. 경제 논리로 간편하게 설명되는 기사를 읽어 나가는 마음이 버석거렸다. 어떻게든 이유를 설명해야 하는 곤란함이 납작한 이해를 만들고 있는 건 아닐까. 생계 곤란이라는 네 글자로 함부로 요약되지 않는 삶‘들’이 있음을 우리는 어떻게 기억하고 기록해야 할까.
자살이 여타의 다른 죽음과 구별되는 가장 큰 특징은 의도한 죽음이며, 이유를 알 수 없다는 데 있다. 살아남은 사람은 그저 추측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창비, 2020)에 따르면 유서를 남기는 자살 사망자는 25~30% 정도로 알려졌지만, 유서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문서가 자살의 이유를 다 설명하지는 않는다. ‘왜’라는 질문은 그렇게 미궁에 처박힌다. 특히나 가까운 존재의 자살은 끊임없이 나의 재해석을 기다린다. 여느 죽음이 다 마찬가지지만 이때 이해와 애도는 홀로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후적이고 사회적인 일로 만들어야 한다. 자살 사망자가 이렇게나 많은 사회에, 자살 유가족은 왜 이토록 눈에 보이지 않는가. 모든 죽음에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그것이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때로 숨막힌다. 수많은 자살 유가족이 설명의 짐을 지는 대신 침묵을 택하는 이유일 테다.
“행복해, 지금 꽤 만족해, 그런데 죽고 싶어”로 이어지는 마음의 흐름과 충동을 느끼는 날들이, 내게도 여전히 남아있다. 담담하게 찾아오는 사라지고 싶다는 욕망을 다루느라 한 번씩 애를 먹는다. ‘죽고 싶다’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떠올릴 때마다 신기하다. 어느 날 한 선생님이 내게 말했다. “일호씨는 왜 사는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나 봐요. 보통은 그냥 살거든요. 그러니까 죽는 것도 생각 안 해요. 잘 살고 싶어서 그런 거니까 나쁘게만 생각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잘 살고 싶은 마음을 ‘잘’ 돌보기 위해서라도, 나는 자살이라는 단어를 햇볕 아래 널어놓고 더 많이 이야기하고 싶다. 죽음 앞에 질문이 멈추지 않도록. 『각자도사 사회』(어크로스, 2023)는 “몸을 ‘생산 가능’ 여부로 판단하고, 돌봄에 가치를 부여하지 않으며, 제도에 대한 불신이 가득한 곳에서 희망할 수 있는 죽음이란 신속하고, 정확하고, 효율적인 자살이나 안락사”라고 지적한다. 그러니 몇 번이고 물을 수밖에 없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혹은 죽음이란 무엇이어야 하는가. 법률과 의학이 그어둔 ‘선’을 넘어 삶의 복잡다단함에 대한 각자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고 싶다. 죽음이야말로 우리 삶의 영원한 주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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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호
<시사IN> 기자. 야망은 크지만 천성이 게을러 스스로를 자주 미워한다. ‘망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말 망해 버리고 싶지는 않다. 묻어가는 일에 능하고 드러나는 일에 수줍은 사람. 이토록 귀찮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책 읽고,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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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우리가 권하고 싶은 책을 팔아보고 자본금 500만 원이 바닥나면 문을 닫자”는 무모하고 무책임한 도전으로부터 출발한 ‘쩜오책방’. 우리 서점은 파주 교하도서관 독서동아리에서 만난 조합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졌습니다. 내년 3월이면 만 10년이 됩니다. 경쟁사회에서 우리도 협동이란 걸 해보면 어떨까, 하고 ‘협동조합’을 차린 것도 무모한 일이었는데 지금까지 잘 버티고 있습니다. 나와 다른 의견에 동의하고 사소한 것을 공유하며, 책방지기들도 많이 배우면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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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서울국제도서전’ 경기도서부스에 참여했어요. 경기도는 지역 서점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하는데요. 덕분에 저희도 작년부터 서울국제도서전에 참가하고 있습니다. 함께 부스를 운영한 풍월당의 경우, 2020년 도서정가제가 흔들릴 때 책방으로 메일을 보내주셨어요. 음반이 사라진 것처럼 책이 사라지는 풍경이 아쉽다고 하셨고요. 그때부터 저희도 풍월당의 좋은 책을 소개하고 클래식 음악 관련 프로그램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저희 서점이 꼭 해야 한다는 일은 따로 없어요. 도움을 필요로 하는 분들을 발견하면 같이 고민하죠. 그것이 책이든, 농산물이든요.
‘쩜오책방의 소규모 부수입원 수도요금마켓’은 반응이 꽤 좋습니다. 청년조합원 ‘뭐하’가 북bar를 제안해 음식점 신고를 했고, 심학산 막걸리를 팔려고 주류판매 등록도 했죠. 그러던 차에 올해 책방 옆 공간을 ‘쩜오플러스’라는 이름으로 열게 됐어요. 책만 팔아서는 운영비를 벌기 어렵더라고요. 조합원이 집에서 만들어 먹는 김에 조금 더 만들어 팔자고 의견을 냈고(물론 보건증 받고 작업합니다) 기대보다 반응이 좋아서 계속하고 있습니다. 조합원들의 깜짝 아이디어는 가능하면 실천해보려고 해요. 그게 조합원 활동에 기운도 되고요. 저희는 작당질이라고 부르는데 쩜오책방의 이벤트가 특별한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웃음)
베스트셀러보다는 숨어있던 책들에 손이 많이 가요. 저희들에게 신간은 큰 의미가 없어요. 그런 책들은 저희들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니까요. 마을의 문제와 관련된 책도 함께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요. 예전부터 지금까지 두고두고 읽는 책이 있어요. 법의인류학자 수 블랙이 쓴 『남아 있는 모든 것』이라는 책인데요. 죽음의 원인을 찾는 법의인류학자가 죽음을 넘어 시신의 삶을 되짚어보고 죽음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하죠.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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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파주페어 북앤컬처 속 북마켓 프로그램인 북소리에서 <다다읽선: 열하일기 완독클럽> 종강 파티를 기획했습니다. 이건 2018년부터 이어져 내려온 협업입니다. 열하일기 완독 클럽 시즌1부터 함께 해왔고 시즌2 수업이 끝난 후 쩜오책방에서는 연암과 조선 후기의 문학을 공부하는 ‘연암학당’을 운영하고 있어요. 박수밀 선생님과 함께 다양한 도반들이 지식을 나누고 있는데 올해 시즌3을 자축하기 위해 종강 파티를 제안했고 늘 그렇듯 돌베개 출판사에서는 내용을 보내주었죠. 그렇게 서로 살을 붙이는 협업이 가장 즐겁습니다.
돌베개 책 중에서는 『열하일기』와 『열하일기 첫걸음』을 좋아합니다. 2018년 열하일기 완독클럽 시즌1을 통해 『열하일기』를 만났을 때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유로운 연암의 사상에 감탄하면서 함께 읽기의 소중함도 느끼게 되었죠. 『열하일기』를 추천하면서 함께 권하는 책이 박수밀 선생님의 『열하일기 첫걸음』입니다. 두 권을 나란히 펼쳐놓고 줄 그어가며 읽다 보면 시간을 넘나드는 연암의 사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책방을 오래 운영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가장 필요하냐고요? 지구력입니다. 책을 읽는 것 자체도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일입니다. 책을 판다는 건 책을 좋아하는 이웃을 찾고, 더 늘이는 일이에요. 이 또한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또 지구력에 더해 책방 단골도 필수입니다. 저희처럼 협동조합으로 운영하지 않는 곳도 혼자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책방지기의 지구력을 응원할 이웃 단골도 빠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책을 판다”는 자세에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책을 팔아야 출판사도 좋은 책을 만들고, 작가도 글을 쓸 수 있잖아요. “우리는 책을 파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속으로라도 외치면서 시간을 쌓아가면 좋겠어요. 동네 책방이야말로 출판사, 작가, 유통사, 독자를 이어주는 중심이라고 자부합니다. 동네 책방은 책을 팔고, 저자와 독자를 이어주고, 함께 읽고 생각을 나누는 독서문화생태계의 핵심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쩜오책방의 책방지기들은 마을 이웃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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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책이 다다르는 곳 — 돌베개 영업부 지방 출장기
안녕하세요, 구독자님들. 연 마케터입니다.🌿 지난 14호에서 첫 출장기를 보여드렸는데요, 이번에는 돌베개 영업부의 정식 출장을 다녀오게 되었습니다. 출발 전, 어마무시한 일정표를 보고 적잖이 놀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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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새벽 다섯 시 반에 출발한다는 첫날 일정을 듣고는 조금 겁이 나기도 했습니다.(운전을 맡아주신 차장님과 부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얼른 운전면허를 따서 멋진 정사원이 되겠습니다…) 일정에 포함된 곳은 대전의 ‘다다르다’ 서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본 적 없던, 그리고 가보고 싶었던 서점들이었습니다. 출장에서 무엇을 하는지 여쭤보니, 요즘에는 거의 사라졌지만 예전에는 직거래처 서점을 직접 방문해 수금액을 받아오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번 출장의 미션은 두 가지였습니다.
1. 직거래처의 장부 확인하기
2. 신영복 선생님의 10주기 기념으로 연말 출간 예정인 『신영복 전집』 영업하기
그리고 제가 스스로에게 정한 미션 한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바로 뒷자리에서 절대 자지 않기… 하지만 그 미션은 처참히 실패했습니다.
📕중앙서점
(전남 순천시 연향상가5길 7)
1958년부터 이어져온 중앙서점은 정겨운 동네 대형 서점입니다. 여전히 지역을 책임지는 서점이라 1층에는 교재와 문구가 가득했습니다. 처음 와본 곳인데도 익숙한 풍경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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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옛날부터 있었을 법한 이 표지판이 귀여워 사진을 찍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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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 @jinjumoongo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240번길 8)
뒷자리에서 졸다가 눈을 뜨면 지역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바뀌는 풍경마다 “여기에 살고 싶어요!”라고 외쳤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른 김장하>에서 봤던 진주에 도착했을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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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문고의 여태훈 대표님께서 직접 차를 내려 주시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정성스레 내려주신 차를 마시며 신입 마케터로서의 태도에 관해 조언해 주셨어요. 진주문고는 진주 책 문화의 중심처럼 느껴졌습니다. 다양한 북토크 포스터들과 정성껏 기획한 큐레이션이 인상 깊었습니다. 쉴 새 없이 책을 정리하는 서점 직원분 곁에는 아직 매대에 올려지지 않은 신간이 가득했습니다. 그 수많은 책이 어떤 모습으로 진주 시민들에게 닿게 될지 상상했습니다.
📙평산책방 @pyeongsanbooks
(경남 양산시 하북면 평산마을1길 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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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책방에 도착하자마자 다봉이와 만복이가 마중 나와 주었습니다. 귀여운 환대를 받고 들어간 책방은 영업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한적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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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 전집』 출간 관련 이야기를 나누고, 숙소로 돌아가기 전 다봉이 만복이와 인사를 나눴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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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산책방을 나서며 마주한 풍경은 평화로웠습니다. 이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어떤 것도 이질적이지 않고 고요할 뿐입니다. 문재인 대통령님께서 왜 이곳에서 머물며 책방을 열었는지 알 것만 같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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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르다 @differeach
(대전 중구 중교로73번길 6)
출장 일정표를 보자마자 가장 반가웠던 서점은 다다르다였습니다. 대전이 고향이라, 다다르다는 입사하기 전부터 애정하던 동네 서점이었습니다. 출판인으로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로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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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르다의 영수증에는 서점일기가 적혀 있습니다.
책을 사면 아주 긴 영수증을 받고, 책을 파는 사람의 마음을 읽는 게 큰 즐거움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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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다르다의 세 번째 공간도 소개해 주셨어요.
옛 가옥을 개조해 만들고 있는 이 공간은 기존 서점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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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완독클럽>을 진행하기 위해 서둘러 서울로 돌아가야 했던 부장님과 함께, 올라올 때는 기차를 탔습니다. 돌아오는 길, 1박 2일 동안 들고 다니기만 했던 『릿터 2025.8.9』를 꺼냈습니다. 청량한 표지의 55호는 ‘고향 만들기’가 주제입니다. 고향인 대전에서 돌아오는 길에 읽고 싶어 챙긴 책이었어요.
1박 2일의 짧지만 긴 출장을 마치고, 수많은 생각에 잠겼습니다. 지역 서점들을 방문하고 이야기를 나눴어요. 계속해서 안 좋아지는 출판 시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또 직접 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책의 미래’에 관해 골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난호에서 저는 여러분께 책은 어떤 가능성이 될 수 있는지 물었어요. 이 질문에 한 구독자님께서 “책은 현재 속에 함께 존재하며, 미래를 바꿔주는 존재라고 믿는다”고 답변해 주셨습니다.(답변해 주신 구독자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에게는 독자님들도 그런 존재입니다.) 저는 그 문장을 오래 읽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저는 혼자 답을 정해두고 질문을 던졌어요.
“책은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책은 무엇이든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출장에서 만난 책을 업으로 정한 사람들의 친절을 떠올리며, 그 믿음이 다시 또렷해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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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과 여백> 피드백 이벤트 🐈
항상 돌베개 북매거진을 구독하고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번 출장에서 구독자님들께 드리고 싶어, 다봉이 만복이 책갈피를 사 왔어요. 피드백을 남겨 주신 구독자님 중 6분께 연 마케터의 출장 선물🎁을 드립니다. 😺 어떤 피드백도 좋으니, 여과 없이 남겨 주세요! 늘 좋은 북매거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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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Book Magazine <행간과 여백>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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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정지연
마케터 김영수, 고운성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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