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호에는 연말 선물로 연 마케터의 비밀 레터가 숨겨져 있습니다 -! 🤍 꼭 찾아서 읽어 주시길 바랍니다 :D
** Hint: 마지막 피드백 박스 속 문장을 잘 봐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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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는 글
전작주의자가 되는 일
어색하기만 했던 ‘2025’라는 숫자에 곧 ‘1’을 더합니다. 올 한 해는 어떠셨나요? 내 마음을 훔친 책이 있었나요? 연말이 되면 3사 온라인서점에서는 ‘올해의 책’을 선정하고, ‘내가 가장 사랑한 작가’가 누구였는지를 데이터로 보여줍니다. 혹시 돌베개 저자들도 등장했나요?
돌베개의 연말은 무척 바빴습니다. 곧 다가오는 신영복 선생님의 10주기(1.15)를 기념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전집을 출간하기 때문입니다. 살아생전 선생님의 모든 책을 출간한 돌베개이기에 10주기를 무엇으로 기념할까 오래 고심했고, 신영복 10주기 헌정 스페셜 에디션 『신영복 전집』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선생님의 글과 말을 사랑했던 독자분들이라면, 이 전집으로 신영복 선생님의 전작주의자가 되어보시면 어떨지 조심스레 권해 봅니다.
<돌베개 북 매거진> No.17. ‘행간’에서는 ‘돌베개 직원들의 2025년 연말 정산’, 신영복 선생님과 생전에 연이 깊었던 한철희 돌베개 대표의 발간사가 담긴 『신영복 전집』을 소개합니다. ‘여백’에서는 ‘작가의 말들’ 그리고 장일호 기자가 새해를 앞두고, 책 속 문장을 통해 2026년의 다짐을 전합니다.
17호 ‘행간과 여백’에서는 어떤 문장에 유독 시선이 오래 머물렀는지,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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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김수진 편집자, 김영수 마케터, 하명성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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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만들고 파는 사람들은 올해 어떤 책을 가장 흥미롭게 읽었을까요? 돌베개의 편집자, 마케터의 올해 가장 좋았던 책 6권을 소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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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가장 좋았던 돌베개 책 3권
- 『녹색 광선』 강석희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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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삶을 송두리째 바꾼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삶의 각도를 미세하게 틀기도 하고, 생각의 모서리를 부수어 세계를 넓히기도 하죠. 일단 보게 된 것을 모른 척하기란 쉽지 않고요. 『녹색 광선』은 저에게 그런 이야기였습니다. 이 작품은 몇 개의 장면들, 이를테면 『그냥, 사람』, 〈두 사람을 위한 식탁〉, 에릭 로메르의 〈녹색 광선〉,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이동권 보장 시위를 경유해 저에게 도착했어요. 처음 만났음에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듯 순식간에 반갑고 그리워졌지요. 저에게, 그리고 이 세계에 필요한 이야기라고 느꼈습니다. 가장 사랑하는 장면은 동자승이 연주에게 검은 돌 묵묵을 건네는 부분, 많이 울었던 장면은 3부에 나오는 이모의 꿈, 그리고 가장 신이 났던 장면은 모두 함께 춤을 추는 부분이에요. 활자를 읽으면서도 공감각적인 체험을 할 수 있어 신기했답니다. 돌베개 유튜브의 『녹색 광선』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이 책을 읽다 보면, 어느새 여러분의 주머니 속에서 묵묵하고 따뜻한 돌멩이 하나가 만져질 거예요. (김수진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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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읽을 수 있는 이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때까지의 긴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 타인에 대한 작은 선의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이야기는 당연한 이야기 같을 수 있지만 역사를 생각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100년을 관통해 세상을 움직인 여인으로 불리는 미국의 사회운동가 그레이스 리 보그스는 세계대전, 미·소냉전, 인종 차별 등 수많은 역사의 현장을 살아가며 폭력 혹은 그에 대한 증오를 휘두른 소수에 의해 세상이 바뀐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힘이 세상을 바꿨다는 생각을 전합니다. 저는 이 소설을 보며 지난 20세기의 험난한 역사가 낳은 ‘새로운 상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작가님의 마음처럼 작은 힘이 모여 더 나은 세상으로 사회를 나아간다는 상식이 유지되길 희망해 봅니다. 지난 20세기의 슬픈 역사를 기억하는 분들이 이 책을 응원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부족한 추천의 마음을 그레이스 리 보그스의 명언으로 덧붙여 전달해 봅니다. "The only way to survive is by taking care of one another.(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서로를 돌보는 것뿐이다)” (김영수 마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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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펼쳐들면 프롤로그인 ‘포성과 비명’에서부터 현재진행형인 저자의 고통, 난청과 이명을 마주하게 됩니다. 포병장교로 근무했으며, 독립연구자로 활동하는 저자는 고통을 겪은 당사자와 참상을 소개하는 관찰자의 시점을 오가며 전쟁의 맨얼굴을 입체적으로 묘사합니다. 전쟁을 동경하고 폭력을 미화하는 호전주의가 얼마나 어리석고 무책임한지, 전쟁을 수행하거나 전쟁에 휘말린 피해자들이 어떤 절망에 마주하는지 보고합니다. 그리고 전쟁에 부역하는 목소리들에 침묵할 때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경고합니다. 보고서, 기사, 연구서, 문학작품, 영화 등 촘촘하게 제시된 인용과 참고문헌을 통해 저자의 집념과 성실함을 가늠할 수 있었습니다.
몸으로 쓴 책이며, 몸으로 읽게 되는 책입니다. 이 책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글줄에 새겨진 고통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게 되실 겁니다. 전쟁을 묘사하는 생생한 표현들은 여러분의 마음속에도 어떤 인상과 상처를 남길지 모릅니다. 그리고 어느새 치열하고도 단호하게, 전쟁에 불복종하게 되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명성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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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가장 좋았던 타 출판사 책 3권
-『4X4의 세계』 조우리 지음 / 노인경 그림, 창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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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 마비 장애로 걷지 못하는 제갈호(가로)가 병원에서 또래 친구 오새롬(세로)을 만나 서로를 진지하게 탐구하고 우정을 나누며 세계를 확장해 가는 이야기예요. 가로와 세로가 세트인 것처럼, 슬픔과 기쁨이 세트라는 걸 알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가 뭉클합니다. 이 세상이 어린이들의 목소리와 마음에 좀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믿기에 동화를 권하고 싶습니다. (김수진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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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 않은 책을 추천합니다. 정아은 작가님은 제게 영업자를 ‘함께 일하는 사람’으로 봐준 첫 작가님입니다. 10년이 넘게 일하며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습니다. 볼 필요 없는 영업자를 보시겠다며 추운 겨울 저녁 출판사까지 찾아와 ‘보이는 사람’으로 존중해 준 작가님의 인간에 대한 호기심과 애정이 아직도 그립습니다. 누구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존중할 줄 알았던 정아은 작가님을 추모하기 위한 소설집이 나왔습니다. 누구라도 좋습니다. 누구라도 정아은 작가님을, 사람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함께 기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김영수 마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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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라는 속담을 떠올렸습니다. 이 책이 AI에게 매를 먼저 맞은 사람들(바둑 기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맞아서 아픈 것도 문제지만, ‘바둑을 둔다’라는 행위의 의미와 가치가 달라진 게 진짜 문제입니다. 다른 분야는 어떨까요? 문학은? 창작은? (소설가가 아닌) 르포작가 장강명은 AI한테 매를 맞으면 어디가 얼마나 어떻게 아픈지 당황스러울 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먼저 맞는 게 나아 보이진 않네요. 맞을 순서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입장도 심란하긴 마찬가지입니다. (하명성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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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영복 전집』 을 준비하며
― 신영복 서거 10주기 헌정 스페셜 에디션
2016년 1월 15일, 신영복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10주기를 앞둔 지금, 다시 선생님의 글을 꺼내 읽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문장은 분명한 답을 내놓기보다는 질문을 남겼고, 개인의 성취보다 관계 속에서의 태도를 돌아보게 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이야기한 ‘공부’는 지식을 쌓는 일이라기보다,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 가까웠습니다.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떤 책임을 감당하며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10주기를 앞둔 지금도 그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돌베개는 이 질문을 현재와 잇기 위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신영복 전집』을 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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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철희 돌베개 대표의 발간사
신영복 선생님 10주기가 다가옵니다. 유난히 추웠던 그해 겨울 성공회대 교정을 가득 메웠던 조문 행렬이 떠오릅니다. 선생님을 잃은 슬픔에 수많은 사람의 마음은 더욱 시렸습니다. 그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세월의 빠름을 실감합니다.
돌베개는 생전에 선생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선생님의 모든 책을 출간해 왔습니다. 출판사로서는 더없는 행운이자 영예였지요. 선생님의 별세 후에도 돌베개의 신영복 책 만들기는 이어집니다. 병상에 계시던 선생님이 마지막 나날까지 매만지셨던 『처음처럼』 개정판을 돌아가신 직후에 펴냈고, 1주기에는 두 권의 유고집 『냇물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손잡고 더불어』를 출간했습니다. 이제 10주기를 맞아 선생님의 모든 말과 글을 갈무리하여 『신영복 전집』을 펴냅니다.
『신영복 전집』은 활자화된 선생님의 모든 것을 망라합니다. 이미 출간된 책들을 포함하는 것은 물론이고 새로운 것들이 추가되었습니다. 기존에 출간되지 않았던 석사 학위 논문 『봉건제 사회의 해체에 관한 고찰』이 새로운 책으로 선보입니다. 청년 신영복의 면모를 발견하는 계기가 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청구회 추억』도 선생님이 손수 그리신 삽화와 함께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밖에 새로 발굴한 몇 편의 글을 유고집에 수록했으며 상세한 연보도 작성하였습니다.
이번 전집은 단지 망라에 그치지 않습니다. 전면적인 교정을 통해 기존 책들의 일부 오류를 바로잡는 등 정본화 작업을 거쳤습니다. 신영복 아카이브의 확실한 토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고품격의 디자인과 장정으로 완성된 전집 세트는 독자들의 서가를 빛내는 애장품이 되리라 기대합니다.
지난 1년 우리는 황당하고도 아찔했던 ‘내란의 밤’을 막아 내고 ‘빛의 혁명’을 이루어 냈습니다. 그러나 갈 길이 아직 먼 지금, 선생님의 말씀을 곱씹어 봅니다.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길게 보면서, 먼 길을 함께 걸었으면 합니다. 저도 그 길에 동행할 것을 약속드리지요.”
―마지막 인터뷰에서
한철희(돌베개 대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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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영복 전집》은 와디즈에서 12월 26일 오픈 예정입니다. 오픈 알림 신청해 주시고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사진을 클릭하시면 와디즈 페이지로 바로 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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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이벤트> ‘나에게 신영복이란?’
신영복 선생님의 10주기를 맞아, 독자님 마음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문장을 모으고자 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책 가운데 가장 인상 깊었던 문장이나 서화, 혹은 선생님께 전하고 싶은 말도 좋습니다.
선생님의 문장과 독자님의 문장이 함께 이어지는 방식으로, 이번 10주기를 함께 맞이하고 싶습니다. 문장을 보내주신 분들 가운데 30분을 선정해 〈2026 신영복 선생님 서화 달력〉을 선물로 드립니다.
*보내주신 문장들은 다다르다 서점에서 진행 예정인 신영복 선생님 10주기 팝업 기획전에 함께 소개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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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쓰는 일을 하는 덕분에 모르는 이들로부터 과분한 호의까지 받고 있었다.”
(『마음의 문제』 한수희 지음, 터틀넥프레스)
“출판계에서 일했을 때, 어땠어요?”라는 질문을 종종 들으면 “정확히는 출판계는 아니고 서점인데요. 서점은 유통 업계이지만”이라고 첨언을 보탰지만, 답은 한결같았다. “손편지를 자주 받아서 좋았어요.” 이 원고가 너무 좋아 만들지 않을 수 없었다는 편집자의 엽서부터, 팟캐스트 청취자들의 따뜻한 리뷰 편지, 안부 인사를 꼭 따로 물었던 마케터의 쪽지. 분명 나에게만 보내지 않을 텐데, 이 수고로움이 어떻게 가능한가 싶었지만 대한민국의 어떤 업계도 이런 아름다운 문화는 따라올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지난 11월 22일 작가노조준비위원회가 주최한 ‘2025 작가노동 실태조사 결과 공유회’에 따르면 한국 작가 대다수가 겸업으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작가노동 선언』에서 도우리 작가는 “말하자면 적은 원고료는 세상과 관계 맺도록 나를 등 떠밀었고, 그 덕분에 나는 지면의 활자가 세계의 전부인 ‘먹물’이 되지 않을 수 있었다.(132쪽)”고 밝히며 “이것이 반드시 긍정적인 ‘견인’이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단지 불안정한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다양한 경로가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작가로서 글을 쓰며 살아가는 일이란 대체 무엇일까?(132쪽)”라고 썼다.
프리랜서 작가로 살아보고 싶지만 출판시장과 내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는 나로서는 평일에는 스타트업에서 일하고, 일주일 중 하루는 동네서점에서 글쓰기 모임을 진행하고 주말에는 틈틈이 글을 쓴다. “와, 주 6일 일하세요?”라고 누가 물으면 “어쩌다 출판계 언저리에서 일하게 돼서요”라며 자조적 표현을 쓰지만, 책을 써서 작가가 돼서 얻은 인연들을 떠올리면 입을 삐죽거릴 수만은 없다. (물론 출판계 상황은 더 나아져야만 한다)
11월 한 달 동안 네 개의 달력을 받았다. 글쓰기 모임 수강생으로 만난 글 친구가 직접 만든 벽걸이 달력부터 일러스트 작가의 포스터 달력, 전국 열두 곳 동네서점에서만 판매하는 ‘우리나라 서점여행 2026’ 달력, 매년 감사히 받고 있는 돌베개의 서화 탁상달력까지. 며칠 전 동네 은행 정문 앞에 붙어 있던 “달력 모두 소진”이라는 안내문과 비교하니, 어쩐지 책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인심이 더 후하게 느껴졌다.
매해 출판시장은 어렵고 내 주머니 사정도 비슷하지만, ‘책’ 때문에 받는 과분하고 특별한 호의는 인색한 적이 없는 듯하다. 바뀌어야 마땅할 사회 문제들이 산적하지만, ‘덕분에’도 잊지 않는 일은 내 마음의 문제가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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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12월이 되면 한 해 동안 읽었던 책을 일별하며 다가올 새해에 붙잡고 나아갈 문장을 뽑는다. 일종의 ‘책 점’이다. 2019년 연말 김금희의 엽편소설집 『나는 그것에 대해 아주 오랫동안 생각해』를 읽다가 충동적으로 시작한 작은 습관이다. 2020년 한 해 내내 이런저런 일로 힘들 때면 “잘은 모르지만 나빠지지는 않으려고”(수록작 「아이리시 고양이」)라는 문장을 펼쳐보곤 했다. 종이 위에 옮겨 적어 지갑 속에 넣어두었다가 생각날 때마다 다짐처럼 꺼내봤다. “말이 되지 못한 채 기척으로만 존재하는 마음 쪽으로.”(『다정한 매일매일』) “자기 삶의 저자인 여자는 웬만큼 다 미쳐 있다.”(『미쳐있고 괴상하며 오만하고 똑똑한 여자들』) “이 세상에 그래도 한 번은 더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여름의 사실』 중 「팩트 체크」 일부) “내 이야기가 비뚤어질수록 좋았다. 아무도 날 교정 못하는 게 좋았다. 정답과 멀어진 내가 좋았다.”(『폭설이었다 그다음은』 중 「자주 틀리는 맞춤법」 일부) “그리고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실패를 끝이 아닌 과정으로 만들 것이다.”(『좋아하길 잘했어』) … 같은 문장들이 지갑 속에서 접혔다 펼쳤다를 반복하면서 생의 받침대가 되어주었다.
2026년 다짐도 적절한 때 도착했다. “우리 남에게 폐만 많이 많이 끼치자. 죽지는 말고.” 김병운의 새 소설집 『거의 사랑하는 거 말고』의 첫 번째 수록작 「봄에는 더 잘해줘」에 나오는 문장이다. 밑줄을 긋는 동안 댓글처럼 달아두고 싶은 문장이 떠올랐다. “민폐는, 혹은 약점은 주위 사람들의 진심과 강점을 이끌어내는 소중한 것입니다. 모든 약점은, 이 사회의 가능성. 저는 앞으로도 소중한 사람이 저에게 폐 끼치기를 원합니다.”(『마이너리티 디자인』) 폐 끼치는 사람이 된다는 건 타인의 돌봄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나의 부족함을 산뜻하게 인정하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 안에 타자가 간섭할 여지를, 타인의 자리를 만들어야 하니까. 때로 어떤 예의 바름은 ‘이만큼까지만’ 허용하는 선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서로에게 폐를 끼칠 기회의 문을 닫아 버리는 셈이다. 나는 ‘올바름’을 무릅쓸 때야 겨우 만들어지는 우정과 사랑의 세계가 있다고, 상대를 더 알고자 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무례를 동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폐를 끼친다’라는 말에 깃든 용기란 얼마나 크고 아름다운가.
폐 끼치는 사람으로 사는 일의 또다른 즐거움은 마음을 표시할 방법을 열심히 궁리하게 된다는 점이다. 내 휴대전화 메모장에는 ‘작은 선물 목록’이라는 제목의 메모가 있다. 선물의 핵심은 ‘내 돈 주고 사기 아까운 것’이다. 2-3만원 사이, 크게 취향을 타지 않는 물건의 목록을 고심하며 썼다 지우는 일은 나의 작은 즐거움이다. 핸드크림, 립밤, 핸드타월, 비누, 꿀, 캐러멜, 소금, 치약, 양말 같은 작은 물건에도 얼마나 다종다양한 브랜드가 있는지. 어디선가 마음을 다쳐 돌아온 밤이면 나는 그 목록을 쭉 훑으며 그 제품과 어울릴 얼굴을 하나씩 떠올려보곤 한다. 그이와 다음에 만날 날을 헤아리고, 미리 작은 선물을 준비하는 동안 구겨졌던 마음도 조금은 펴지는 기분이 든다.
언제나 실패하지 않는 선물도 있다. 시집이다. 가볍고, 싸고, 무엇보다 처음부터 읽지 않아도 된다. 유명한 시인의 시집도 좋지만, 첫 시집을 낸 신인들의 시집을 부러 골라 가방에 넣고 다닌다. 무언가 주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 언제든 덥석 줄 수 있도록. 지금 내 가방에 들어있는 건 창비에서 나온 『반대편에서 만나』다. 창비는 첫 시집을 낸 시인의 초판본에 한해 별도 커버를 만드는데, 열심히 그 시집을 사서 선물하다가, 어느 순간 커버 없는 시집이 배송되면 혼자 슬쩍 웃곤 한다. ‘2쇄를 찍었구나’를 선물처럼 알게 된다. 시집을 팔아 버는 돈은 너무 작고 작아서 밥이 될 수 없겠지. 하지만 새로 쓸 힘이, 다시 책상 앞에 앉을 이유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새해에도 더 많은 시인의 처음을 기쁘게 목격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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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일호
<시사IN> 기자. 야망은 크지만 천성이 게을러 스스로를 자주 미워한다. ‘망했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정말 망해 버리고 싶지는 않다. 묻어가는 일에 능하고 드러나는 일에 수줍은 사람. 이토록 귀찮은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궁금해서 책 읽고, 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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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늘 인정받으려고 애쓸까? 나는 왜 사랑받기 위해 나 자신을 지우게 될까? 나는 왜 엄마의 말과 시선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할까?
이 질문에 오래 머물러온 사람들에게 『나는 왜 늘 인정받으려고 애쓸까』는 유년기 관계 속에서 형성된 심리 구조를 차분히 짚어보며, 자기 삶의 중심을 다시 세우는 길을 안내하는 인문 심리서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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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간과 여백은 어떠셨나요?
피드백 남겨 주시면 계속해서 발전해 나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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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Book Magazine <행간과 여백>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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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정지연
마케터 김영수, 고운성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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