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부록! 편집자와 마케터의 <인생 만화 잡담회> 여는 글
책의 실용성
예능 프로그램을 보던 중 지역 서점이 등장했습니다. 아쉽게도 상호명은 나오지 않아, 서점 정보는 볼 수 없었는데요. 일반인 출연자 두 명이 대화를 나눴습니다.
“저는 소설은 안 좋아해요. 자기계발서도 별로고요. 좀 실용적인 책이 좋아요.”
“어, 저도 그런데요.”
두 사람은 과연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 걸까 궁금했는데, 아쉽게도 뒷이야기는 방송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장르의 책을 좋아하나요? 소설? 시? 에세이? 인문? 그림책? 만화? 실용서? 책은 크게 두 분야로 나누곤 하죠. 문학 VS 비문학. 대개의 사람들은 비문학 도서가 더 실용적이라고 말하는데, 가끔은 이런 생각이 들곤 합니다. ‘어쩌면 문학이야말로 가장 큰 실용성을 지닌 책이 아닐까.’ 정수윤 작가님이 쓰신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나니, 이 생각이 한층 짙어집니다.
‘행간과 여백’ 20호에서는 2024년 출간 후 꾸준히 사랑 받고 있는 『파도의 아이들』 정수윤 작가님의 서간문, 옮긴이의 말을 읽고 나면 더 궁금해지는 책 『신자유주의적 상상』의 번역 후기, 연희동 만화 카페 ‘페잇퍼’에서 진행한 ‘편집자와 마케터의 인생 만화 잡담회’, 작가의 말들, 장일호 <시사IN> 기자의 ‘집으로 돌아가기’ 칼럼을 담았습니다.
20호에는 소설, 인문, 만화, 에세이 등 여라 장르의 도서가 등장하는데요. 과연 이 책들의 비실용성을 우리가 확언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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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 1만 부 기념 독자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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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 님
여러분은 언제 첫 바다를 보았나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바다를 기억하시나요? 끝도 없이 펼쳐진 검고 푸른 물, 그 위로 쏟아지는 금빛 햇살과 우리에게 손짓하듯 다가오는 파도. 그저 멍하니 바라만 보아도 속이 뻥 뚫릴 것만 같은 그런 바다를, 한 번도 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반쪽, 북한 아이들 이야기입니다.
『파도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을 지은 건 탈북한 아이들이 제게 들려준 이야기 중에 남한에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바다를 보았다는 말이 가장 인상 깊었기 때문입니다. 평안남도 평성이 고향인 한 친구는 국정원을 지나 하나원 생활을 마친 후 난생처음 강원도 양양에서 바다를 보고 마구 소리를 지르며 파도 속으로 달려들었다고 했습니다. 옷이 젖는 줄도 모르고 그냥 뛰어들었다고요. 그 친구는 지금도 돈을 모아 여름이면 양양으로 달려가 서핑한다고 합니다. 새벽에 어두운 바다 위에서 멀리 수평선 위에 떠오르는 태양을 바라보는 게 자기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안 추워? 제가 물었습니다. 에이, 그 정도 추위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걸 볼 수 있는데요.
얼마 전에는 KBS 월드 라디오의 일본어 방송 <현해탄의 무지개>에 출연해서 일본에 번역된 『파도의 아이들』 이야기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일본으로 송출되는 전파이지만 국내에서는 인터넷으로 들을 수 있어요(https://world.kbs.co.kr). 그런데 이걸 들은 일본 분들이 도쿄, 니가타, 이와테 등 각지에서 메시지를 보내 주셨습니다. 공통적 의견이 “아이들이 바다를 보지 못하고 자란다는 데에 깜짝 놀랐다”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웃 나라 사람들도 저처럼 그 점이 가장 인상 깊었던 모양입니다. 광활한 땅이 하염없이 펼쳐진 대륙에 산다면 조금 다르겠지만, 길쭉하게 생긴 반도 한국과 역시 기다란 섬나라 일본은 아무래도 바다가 애틋한가 봅니다. 게다가 일본은 바다 하나 건너면 곧장 북한인 지역이 많으니까요.
실제로 이 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해 주신 사이토 마리코 번역가님도 고향인 니가타에서 이 책을 번역하셨는데 니가타도 바다 건너가 북한입니다. 예전엔 청진항으로 배도 다녔죠. 번역가님은 집에서 5분 거리에 바다가 있어서 그 바다를 바라보며 ‘저 너머에 설이와 여름이와 광민이가 살고 있겠지’ 하고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그때 마리코 선생님이 니가타 앞 바다에서 멀리 북한 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을 보내 주셨는데, 여러분께도 보여 드릴게요.) 어떤가요, 한국의 바다와 비슷한가요, 조금 더 짙고 검은가요. 지금도 저 너머에 파도에 닿을 수 없는 파도의 아이들이 살고 있을까요. 그 아이들은 또 얼마나 순수하게 꿈을 꾸고 그 꿈이 좌절된 채 살아갈까요.
전쟁의 그림자로 바다 저편이 피로 물드는 요즘입니다. 바다는 모두 이어져 있기에 우리의 바다도 마냥 낭만적으로 보이지는 않네요. 우리는 이 잔인한 세상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어째서 사람들은 지난 세기의 저 끔찍한 전쟁에서 배움을 얻지 못하고 자꾸만 엉뚱한 방향으로 세상을 흔들어 놓으려고 하는 걸까요? 제일 나쁜 건 정의롭지 못한 지도자에게 권력을 넘기고 마는 일 같습니다. 민주주의도 그 판단이 잘못되면 국민은 전쟁의 도가니로 쉬이 내몰린다는 걸 우린 바로 얼마 전에 깨달았지요.
옳고 그름을 올바로 가리기 위해서 우리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특히 소설을. 저는 소설을 통해 내가 아닌 다른 시공간 사람들의 삶과 꿈과 기억을 대신 경험함으로써 더 넓은 시각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거는 희망은 오직 그것입니다.
개구리가 우물에서 나오도록 만드는 좋은 소설. 그런, 소설을, 쓰고 싶어요. 누구나 기꺼이, 타인의 삶을 살아보고 싶어서, 타인의 문을 열고 싶게 만드는. 특히 어린 학생들이, 그 문을 열고 싶어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 책을 쓰고 싶습니다.
앞으로도 지켜봐 주세요. 고맙습니다.
정수윤 드림
- 니가타 앞 바다에서 멀리 북한 쪽을 바라보며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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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의 사랑 덕분에 『파도의 아이들』 일본어판이 출간될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_돌베개 일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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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대학에 근무하는 동료가 얼마 전에 들려준 이야기다. 학기가 끝나고 성적 처리까지 마친 후 한 학생이 자신의 학점에 실망하며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조금은 난감한 마음으로 맞이한 그 학생의 이야기는 다짜고짜 성적을 올려달라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선생님께서 어쩔 수 없으시다는 것 잘 안다고, 하지만 자기는 이번 학기에 진짜 재미있게 공부 열심히 했다고, 그냥 그것을 말씀드리고 싶었다는 것이다.
사태의 부조리함을 느끼면서도 단 1점의 차이일지라도 경쟁을 통해 우열을 가리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는 원칙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 ‘착한’ 학생에게 선생은 대학이 원래 이랬던 것은 아니라고, 상대평가를 하는 게 당연한 게 아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자신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 상대평가제 전면 실시를 핵심으로 하는 조치가 ‘학사관리 엄정화’라는 이름으로 추진될 때 그에 맞선 학생들의 교육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방관한 탓이라고, 그때 막아내지 못하고 이런 대학을 물려주어 미안하다고, 지금이라도 내가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꿔보겠다고, 그러니까 학생도 이런 문제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보길 바란다고. 상대평가가 아닌 평가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던 학생은 충격을 받았고, 힘껏 저항하지 못했던 과거의 ‘착한’ 자신을 떠올린 교수는 약 20년 사이에 무엇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생각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신자유주의는 보이지 않는다. 이제는 누구도 신자유주의가 문제라고, 신자유주의를 막아내자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겪는 모든 문제적 사태의 근원에 신자유주의가 있다는 자못 근엄하고 진지한 선언에 고개를 끄덕일 이들도 이제 없다. 오히려 즉각적인 반문이 돌아올 것이다. 신자유주의라고? 뭐가 신자유주의인데? 설령 그렇다 한들, 뭘 어떻게 할 건데?
이제 신자유주의는 무언가에 대한 설명항으로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것은 다양한 사태에 대한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될 수 있을 만큼 단일한 성격을 가진 실체가 아니라 종적 다양성과 내적 이질성을 가지고 있는 복잡하고 다면적인 무언가이고, 온갖 것의 원인으로 겨냥되는 과녁의 한 지점이 아니라 도처에 퍼져 있어서 비판의 대상으로 수렴되지 못하는 무언가이며, 모든 현상의 배후에 음험하게 도사리고 있는 낯설고 생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 자신과 한 몸이 되어 너무나 일상적이고 친숙한 무언가이다.
이미 신자유주의의 힘은 말로 포획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신자유주의는 능력과 수행실적을 바탕으로 보상 체계가 만들어져야 한다는 믿음이나, 삶을 일종의 커리어 구축 과정으로 여기며 미래를 기획해나가는 전략에 앞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마치 본성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것 이외의 다른 삶은 상상조차 어렵게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적 상상』은 신자유주의를 ‘상상’의 차원에서 분석할 것을 제안한다. 여기서 말하는 상상이란 담론, 표상, 그리고 미학의 복합체로서 기술적 양식을 통해 매개되고 생태학적 사건들과 함께 변형되는 인간 경험의 총체이다. 그것은 세계에 대한 관점이나 전망인 동시에, 그러한 관념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내며 살아가고 있는 세계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처럼 상상에 주목하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좁은 의미의 경제 체제로 파악하지 않고 문화라는 보다 넓은 범주로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신자유주의적 상상을 탐구한다는 것은 신자유주의를 우리 삶의 압도적인 조건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신자유주의가 이 정도까지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조건을 살펴보는 것이고, 나아가 신자유주의가 아닌 다른 삶의 양식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할 것인지 타진하는 시도이다.
고도의 경쟁 속에 자살, 빈곤, 수도권 집중, 차별, 증오 등 온갖 유형의 사회문제가 심화되고 있는 한국이 과연 지금과는 다른 경로를 모색하는 것이 가능할까? 그리하여 경제활동을 통해서는 환경 속에서 타인과 함께 살림살이를 해나가는 존재로서의 능력을 확인하고, 문화를 통해서는 시장에서와는 다른 감각과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기술적 혁신을 통해서는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새로운 사회에 대한 상상을 구현해내는 사회가 가능할까? 어떻게? 신자유주의적이지 않은 다른 상상을 통해서? 그런 상상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 책을 통해 많은 독자들과 함께 답을 모색하고 싶은 질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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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제32회 전태일문학상 르포 부문 수상자, 현장노동자 양성민의 첫 책. 일상의 이야기를 통해 풍부한 아마추어 작가의 솜씨로 삶과 세상의 풍경을 써냈다. ‘죽거나 혹은 퇴근’하고 ‘떼인 돈’을 스스로 받아내야 하는 녹록지 않은 노동환경 속에서, 비판적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여전한 인생을 냉소하지 않는 특유의 낙천성에는 울림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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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돌보고 키운다는 것은 수고롭지만 그 무엇보다도 창조적인 일이다. 세상 어떤 일도 나의 개성과 취향, 오랜 고집과 가치관을 이토록 오롯이 반영하지 못한다.”
(『탐욕스러운 돌봄』 신성아 지음, 한겨레출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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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때 들었던 이야기 하나. “야, 결혼한 상대를 보면 그 사람의 진짜 가치관을 알게 돼. 왜인 줄 알아? 외모가 전혀 안 중요하다고 평생 말해 놓고, 외모가 특출난 사람이랑 결혼한다?! 그건 그동안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한 거야. 결혼은 한 사람에게 너무 중요한 사건이잖아. 자신의 가치관이 드러날 수밖에 없어. 정말로 마음 착한 게 최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국 그런 사람이랑 만나는 거야.”
아, 실로 맞는 말. 나와 평생 살 사람을 선택할 때, 어찌 자신의 가치관이 드러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이를 키울 때도 마찬가지다. 선행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어떻게든 아이를 일찌감치 사교육 시장으로 끌고 가고, 저학년 때는 무조건 체험학습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모는 주말마다 박물관, 미술관, 캠핑장 등으로 아이를 데리고 간다. 외적 작용도 존재하겠지만 어쨌든 부모 자신의 선택, 의지다.
아침밥을 안 먹으면 절대 등교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을 보낸 나. 나도 내 엄마와 똑같은 엄마가 되어 아이의 아침밥에 목숨을 건다. 판이하게 다른 선택도 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좌석버스를 타고 통학을 했던 학창시절이 괴로웠던 터, 내 아이는 무조건 도보로 갈 수 있는 학교를 보내고 싶었다. 결국 동네가 모두 평지라서 자유롭게 자전거를 탈 수 있는 곳을 찾아, 아이를 입학시켰다. 학군지는 특히 피했다.
알록달록한 원색 계열의 양말도 잘 신던 아이는 이제 스포츠 브랜드의 검은색 후드 티셔츠만 골라 입는다. 깨소스로 버무린 브로콜리 달걀 샐러드도 맛있게 잘 먹더니, 아침에 줄 때는 소스 없이 따로따로 달라고 말한다. 찐 달걀을 주려면 꼭 얇게 슬라이스 해 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취향이 조금씩 생기는 아이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부모가 누릴 수 있는 작은 기쁨이다.
“엄마 말이 다 맞는 거 아냐.” “네 마음이 더 중요해.” 아이가 커갈수록 나는 이 말을 더 많이 하고 싶다. 내가 믿어 온 가치관의 실체가 꼭 정답일 수는 없으니까. 식탁 위 반찬을 만들어줄 수는 있지만, 무엇을 먼저 먹을지 고르는 건 아이의 몫이니까. 자꾸만 참견하고 싶은 마음은 봉인하고, 내 탐욕으로 인한 돌봄을 수행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경계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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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백
장일호 <시사IN> 기자 (@ilhostyle)
다소 삐딱하게 앉아 있었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중계를 틀어놓고선 보는 것도 안 보는 것도 아닌 상태로. 한국 대표팀이 8강에 진출할 확률은 13%라고 했다. 3월 9일 경기에서 한국 대표팀은 오스트레일리아 대표팀에 5점 차 이상으로 이기되, 실점은 최대 2점이어야만 했다. ‘대충하고 빨리 들어와서 시즌 준비하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국가대표팀 최대 차출팀인 엘지트윈스의 오랜 팬인 나는 ‘저게 대표팀인지 내 팀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17년 만의 8강 진출보다 혹시나 ‘내 선수’들이 개막 전에 다치기라도 할까 봐 자꾸만 화만 났다.
그러나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기면 좋은 것이다. 8강행이 확정되는 순간, 문보경 선수가 마지막 아웃카운트를 잡고 냅다 글로브를 집어던지던 그 순간, 나는 밥숟가락을 놓고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이게 되네. 박용택 KBS 해설위원이 알 없는 안경 속으로 휴지를 집어넣으며 통곡할 때, 오지환 선수가 집에서 중계를 보다가 바닥에 엎드려 우는 사진을 볼 때, 중계 화면 속 고우석 선수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무릎을 꿇는 장면을 발견했을 때, 나도 속수무책 울고 말았다.
야구는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이 ‘집(home)’으로 돌아와야만 이기는 게임이다. 야구 규칙은 꽤 복잡해 보이지만 한 줄 요약도 가능하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것. 짜릿한 승부에 대한 기쁨도 잠시, 이어지는 뉴스는 온통 전쟁 소식이었다. 행복해지려고 뉴스를 보는 사람은 없겠지만 요즘은 특히나 제정신 차리기 힘들다. 유가와 주가와 물가 같은 단어 속에서 자주 아득해진다. 폭탄이 떨어지지 않는 안락한 집안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들을 떠올렸다.
3월 8일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사는 호세인 야즈디(Hossein Yazdi)는 자신의 SNS에 눈을 꼭 감은 채 사료를 먹고 있는 흰색 고양이 사진을 올렸다. 페르시아어로 쓰인 글을 읽기 위해 ‘번역하기’를 누르니 금세 AI가 번역해 주었다(나는 AI가 전쟁의 주요 플레이어라는 사실에 잠시 몸을 떤다). “폭탄 공격이 시작되면 우리 고양이가 엄청나게 긴장해요! 눈을 꽉 감고 머리를 밥그릇 속에 집어넣고서 급하게 밥을 먹어요! 이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이 가엾은 생물들, 그저 자신의 감정만 느끼는 존재들에 대해 마음이 찢어질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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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 테헤란의 하늘은 ‘석유 비’로 검게 물들었다. 주요 연료 보급 기지들이 집중 공습을 받았고, 석유 저장고가 폭발하면서 유독 가스와 연기가 대량으로 분출되며 햇빛을 가렸다. 에스마일 바가에이 이란 외무부 대변인은 석유 저장고에 대한 공격을 “화학전이나 다름없는 전쟁범죄”로 규정했다. AFP의 인터뷰에 응한 50대 남성은 “아침에 일어났는데 바깥이 어두워 자명종이 고장 난 줄 알았다”고 말했다. 종말의 풍경 속에서도 사람들은 일상을 산다. 그러나 집안도 집 바깥도 불안에 휩싸여있다. 전쟁의 잔인함에 여기 있다. 전쟁은 그 어디도 집이 될 수 없게 만든다.
서울과 테헤란은 직선거리로 약 6560km 떨어져 있다. 덕분에 내 집 앞에는 폭탄이 떨어지지 않고, 덕분에 나는 야구 중계를 보고 화를 내거나 환호한다. 그리고 나는 인간이란 내 집 앞에 폭탄이 터지지 않아도 포연 속에 있는 존재들의 고통을 느끼고 헤아릴 수 있다고 믿는다. 이런 시절에 내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력해지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 SF 작가인 정소연 변호사는 에세이 『세계의 악당으로부터 나를 구하는 법』(은행나무, 2021)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행동하는 방법 중 하나를 알려준다. “‘세상이 본래 그렇지 뭐’라고 말하는 대신, 백번을 놀라고 거듭 놀라고, 그러면 안 된다고 백번을 거듭 말려야 한다.” ‘전쟁의 목격자’인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와 용기가 그 말 속에 모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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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집
인생 만화 잡담회
─ 고민이 조금 납작하고 가벼워지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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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독자님들! 연 마케터입니다. 여러분에게 독서의 기원은 무엇이었나요? 제게 선명하게 남아 있는 기원은 ‘만화책’이었습니다.
요즘 제가 즐겨 보는 유튜브 콘텐츠 중 하나가 <B주류 초대석>인데요. 그중에서 특히 인상 깊었던 ‘인생 만화 설명회’를 보고, <행간과 여백> 20호에서 만화 이야기를 나눠 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바로 ‘편집자와 마케터의 인생 만화 잡담회!’입니다.
제가 애정하는 연희동 만화 카페 ‘페잇퍼’에서 김수진 편집자님과 함께 서로의 인생 만화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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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안녕하세요, 편집자 수입니다. 돌베개에서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마음에 다가가는 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성장담과 학원물을 좋아합니다.
연: 인생 만화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수진 편집자님이 처음 만화를 접한 계기가 궁금합니다.
수: 그전에도 이런저런 만화책을 봤겠지만 선명하게 기억나는 건 초등학교 3~4학년 때쯤이에요.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사촌 언니들 책장에 『르네상스』, 『하이센스』 같은 만화 잡지들이 가득했어요. 큰집에 가면 언니들 방에 혼자 틀어박혀서 그 잡지들을 읽었어요.
연: 저도 초등학교 3,4학년쯤 친오빠를 따라 만화방에 가면서 만화 인생이 시작된 기억이 나네요.
수: 그 나이쯤 되면 만화를 읽고 싶다는 열의가 생기는 것 같아요. 게다가 마침 도서 대여점이 많이 생기던 시기여서, 초등학교 고학년 때는 대여점에서 무급 알바를 할 정도로 자주 갔습니다.(웃음) 사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어린이 고객이었죠. 누구보다 빨리 읽고 반납하는 단골이었거든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순정만화를, 대학에 가서는 소년만화를 많이 읽었습니다.
연: 어릴 때 만화 편집자를 꿈꾸셨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요.
수: 꿈이라고 하기엔 정말 잠깐 스쳐갔던 생각이라 좀 부끄러운데요. 초등학생 때 만화 편집자를 꿈꾼 적이 있어요. 저는 그림에 재능이 별로 없다는 걸 일찌감치 깨달았고, 또 성향상 상상력이 풍부한 편도 아니라 창작을 하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만화는 너무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이 세계에 가까이 갈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생각하다가 만화 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됐어요.
만화 잡지나 단행본의 후기 페이지에 작가가 원고 작업을 하며 겪은 일이나 편집자와의 에피소드가 종종 등장했거든요. 어린 마음에 단순하게 생각했어요. 좋아하는 만화를 가장 먼저 읽고,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을 돕는 사람이라고요. 그래서 “이거다!” 싶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세월이 지나 정신을 차려 보니 이렇게 다른 분야의 편집자가 되어 있네요. (웃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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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인의 필독서 『중쇄를 찍자!』만화 편집자의 희로애락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입니다. 저는 드라마로 먼저 접했답니다. _ 연 마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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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인생 만화를 소개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수: 시기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지만, 지난 십 년을 통틀어 출간을 기다리며 애독했던 만화는 『바닷마을 다이어리』인 것 같아요. 어른들의 사정으로 바닷가 마을에서 함께 살게 된 네 자매의 이야기인데요. 가족 일상물, 성장담, 일과 사랑, 여성 서사, 스포츠물의 요소가 모두 들어 있는 작품입니다. 저한테는 그야말로 종합 선물 세트!
저마다 결함이 있지만 마음속에 선의를 가진 사람들이 서로의 취약함을 바라보고 의지처가 되어 주며 살아가는 이야기라 좋아합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과 믿음을 회복하고 싶을 때 보고 싶어져요. 만화로 인생을 배운다는 감각을 느낄 때가 있는데, 이 만화에서도 많은 걸 배웠어요.
연: 『바닷마을 다이어리』 1권에서 스즈가 환하게 웃는 장면이 기억에 남아요. 오래전에 읽었는데도요.
수: 저도 그 장면 정말 좋아해요. 대사가 없어도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지죠. 만화의 근사한 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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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제 인생 만화는 고아라 작가의 『마음의 숙제』입니다. 웹툰 연재 당시 매주 빠지지 않고 챙겨 보던 작품이었어요. 첫사랑의 실종 이후 마음의 짐을 안고 살아가던 주인공 이경이, 흡혈귀들이 모여 사는 동네로 이사 가게 되면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그곳에서 흡혈귀가 된 첫사랑과 다시 만나고, 이웃들과 관계를 맺으며 조금씩 마음을 나누게 됩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장면은 인물들이 서로에게 서운했던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순간들이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을 알지 못할 때는 두려움이 커지고 마음이 제멋대로 그림자를 키우지만, 결국 서로의 이야기를 듣고 말하는 과정에서 그 ‘마음의 숙제’들이 조금씩 풀려 가거든요. 이 작품의 주인공 이경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조금만 읽어 보셔도 바로 느끼실 거라 생각합니다.
수: ‘흡혈귀’라는 설정이 결국 사회의 소수자들을 판타지적으로 비유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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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 편집자님은 ‘페잇퍼’ 공간을 처음 와 보셨는데 어떠셨나요?
수: 어린 시절에 다니던 만화방과는 조금 다른 분위기라 흥미로워요. 예전 만화방이 책을 빌려 읽는 공간이었다면, 여기는 만화를 읽고 그 세계에 집중해서 머물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가 가득한 공간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읽고 있는 만화와 비슷한 결의 다른 책을 추천해 주는 도서 대출 카드 형태의 큐레이션도 재밌고요.
저는 삶이 너무 진지하고 심각하게 느껴질 때 만화를 읽고 싶어지더라고요. 만화를 통해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 나오면, 제 고민이 조금 납작하고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페잇퍼’는 그런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공간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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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서대문구 연희로15안길 32-7 1층
연 마케터 추천 음식: 비건 토마토 라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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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행간과 여백은 어떠셨나요? 마케터는 피드백을 먹고 자랍니다... 🌱
소중한 피드백 남겨 주시면 계속 발전하는 북매거진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구독자 님!
_연 마케터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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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Book Magazine <행간과 여백> #20
-
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정지연
마케터 김영수, 고운성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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