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으로 독자 기고 수록 여는 글
독자를 만나는 일
올해 목표가 “꾸준히 글쓰기”인 지우(知友)를 만났습니다. 수년간 자신만 볼 수 있는 공간에 조각글을 올리고 있다는 그에게 “공개 글쓰기를 해보라”고 권했습니다. 꽤 감각이 좋은 친구거든요. “나는 책을 낼 생각이 전혀 없다”고 고개를 흔드는 그에게 “독자를 만나야 이야기가 확장된다”고 설득했습니다. 과연 친구는 미지의 독자를 만날 수 있을까요?
세상의 독자들에게 다정한 안부를 전하고 싶은 <행간과 여백> 19호에서는 청소년소설 『유자는 없어』를 펴낸 김지현 작가 인터뷰, 대전에서 진행된 신영복 선생 추모 10주기 팝업 기획전 〈다시, 처음처럼〉 후기, 출판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였던 ‘이해찬 전 총리’ 추도문, 작가의 말들, 장일호 기자의 연재 칼럼 ‘1인분의 삶’을 담았습니다.
생성형 AI로 만든 책들이 쏟아지고 ‘딸깍북’이라는 신조어까지 탄생한 2026년. 돌베개는 한결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독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그래서 레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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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호에는 고등학생 인턴 후기 글이 깜짝 비밀레터로 숨어 있습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D
(힌트: 하단 피드백 이벤트 칸 속 이모티콘🙇🏻을 유심히 봐주세요 -!)
** <다시, 처음처럼> 엽서와 책갈피를 선물로 드리는 피드백 이벤트도 있으니 꼭 참여해 주세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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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청소년문학 시리즈 ‘꿈꾸는 돌’ 45번째 작품은 김지현 소설가의 『유자는 없어』입니다. 그간 김지현 작가는 아이돌 덕질, 동물권과 채식, 꿈과 무의식 등 청소년소설에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던 소재로 소설을 써왔습니다. 『유자는 없어』는 작가의 고향인 거제도를 배경으로 한 성장소설로 지역 청소년이 느낄 법한 생각들을 ‘당사자’ 문학으로 담아냈습니다. 창원, 거제에서 청소년시기를 보내고 지금은 대구에서 고양이 한 마리와 일상을 보내는 김지현 작가를 만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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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는 ‘거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이에요. 작가님의 고향을 배경으로 선택한 마음은 무엇이었을까요?
처음 이 소설을 구상할 때는 ‘서울에서 어떤 실패(아이돌 연습생, 입시 등)를 겪은 주인공이 지방 소도시로 와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다시 일어서는 이야기’ 정도를 떠올렸어요. 그런데 대도시의 삶을 경험한 주인공보다는 ‘지방 소도시에서 줄곧 자란 청소년’의 내면을 내가 더 잘 알고, 더 잘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보통 지방에 사는 10대라고 하면 막연히 도시에 동경이 있을 거라 예상하고, 작품에서도 뻔하고 납작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많은데 모두가 ‘인 서울’을 갈망하면서 사는 건 아니거든요. 그렇다면 나는 지방 소도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당사자로서 좀 다른 이야기를 해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복잡하면서도 솔직한 내면을 그려 보고 싶은 생각으로 소설의 배경을 제가 실제 살았던 도시로 정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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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자는 없어』에는 세 명의 주인공 ‘지안, 수영, 해민’이 등장합니다. 각 인물이 주는 메시지가 있을까요?
결국에는 모두가 자기 ‘정체성’을 찾으려고 애쓰는 인물이라고 생각해요. 청소년기에는 남들이랑 구분되는 뚜렷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 욕구가 강하고,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를 많이 의식하는 시간을 보내잖아요.
그래서 주인공 지안이는 남들에게 불리는 수식어나 ‘타이틀’에 굉장히 몰두하고, 수영이는 어떤 좌절을 겪고 나서 ‘내 인생은 망했어. 남들도 나를 패배자로 볼 거야.’라고 스스로 낙인을 찍고 위축되는 모습이 나와요. 반면에 해민이라는 인물은 친구들 사이에서 ‘서울에서 온 전학생’이라고 불리고 사소한 행동도 ‘서울에서 살다 와서 저러나?’ 하는 추측 혹은 편견이 따라붙는 아이인데, 정작 본인은 ‘대도시 출신’이라는 자의식을 갖고 있지 않거든요.
저는 한 사람의 정체성을 만들고 설명하는 방식에는 정답이 없고, 저마다 다르다고 생각해요. 다만 자신의 약하고 부족한 부분까지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스스로를 잘 알고 확신을 가져야, 내가 어쩌다가 나쁜 평가를 받거나 어떤 좌절을 겪는 등의 상황들이 닥쳐도 ‘나의 본질(정체성)’을 잃어버리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청소년 독자들이 ‘나는 어떤 사람일까?’, ‘지금의 나를 이루고 또 지탱해 주는 것은 무엇일까?’를 자주 고민하고 찾아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지안과 수영 모두 자신의 기준에서 ‘실패’를 경험하지만, 실패를 마주하는 방식이 다르게 느껴져요.
지안이는 ‘전교 1등’ 타이틀을 놓치면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지지만 그걸 겉으로 티 내지 않고 하루하루 버티면서 일상을 보내요. 반면 수영이는 ‘다 리셋하고 새로 시작하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환경이 바뀌기를 바라고, 그러다 결국 등교를 거부해요. 두 사람은 각기 다른 선택을 해요. 한 사람은 좌절 속에서도 일상을 유지하고, 한 사람은 스스로가 감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잠깐 쉬어가자고 결단하죠. 저는 두 사람의 선택 모두 용기가 필요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둘의 모습이 안타깝고 또 이해가 됐어요. 동시에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고 다독이면서 지금 여기에서 다시 시작해보자고 함께 용기를 내는 모습이 좋았어요.
소설에 ‘토요 비대면 영화 모임’이 등장하죠. 배경이 궁금했어요.
우선 저부터가 친구들과 같은 대상을 좋아하거나 어떤 활동을 함께 하면서 친해진 경험이 많기 때문이에요. 제 소설에는 책이나 드라마, 영화를 좋아하고 친구들과 함께 감상하는 청소년 인물이 매번 나오는데요. 제가 책과 영화를 좋아해서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세계를 친구와 함께 좋아하고 알아갈 때, 서로를 새롭게 알게 되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현실의 청소년 독자들도 친구들이랑 당장 공부나 입시에서 벗어난 다양한 활동을 하면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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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길 원하는 청소년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요.
『유자는 없어』에는 어떤 인물이 쓴 단편소설과 드라마 단막극의 줄거리가 짧게 등장하는데요. 모두 제가 실제로 문학 공모에 응모했다가 탈락한 소설에서 가져온 스토리예요. 공모전에서 떨어졌으니까 ‘이건 망한 글이야.’, ‘부끄러우니까 아무한테도 보여 주지 말자.’하고 영영 묻어둘 수도 있지만, 그 글도 제게는 애틋해서 어떻게든 세상 밖으로 꺼내주고 싶었어요. 사람마다 부족하고 미숙한 부분들이 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수용하고 개선할 수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약점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한 번 이겨낸 실패’는 또 다른 시련이 닥쳤을 때 ‘버틸 수 있는 내력’이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었어요.
『유자는 없어』를 읽을 미래의 독자들께 하고 싶으신 이야기가 있나요?
소설에서 지안이가 “나는 나의 어떤 부분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나.” 독백하는 부분이 나오는데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은 하는 생각일 것 같아요. 수시로 내가 마음에 안 들고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 찾아오지만, 세상에서 가장 내가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잖아요. 힘들고 절망적인 순간일수록 자신을 놓지 말기를, 나에게 좀더 너그러워지면 좋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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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다시, 처음처럼
─ 대전 원도심에서 전시를 기획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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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2026년이라는 게 실감납니다. 연말과 연초를 가득 채웠던 신영복 선생님 추모 10주기 팝업 기획전 〈다시, 처음처럼〉이 끝나고 나서야 비로소 숨을 고르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처음처럼〉은 지난 〈행간과 여백〉 15호 지역 서점 출장기에서 잠시 소개했던 공간, ‘다다르다 시도’에서 1월 15일부터 25일까지, 총 11일간 진행되었습니다. 수도권이 아닌 지역에서 열린 돌베개의 첫 팝업 전시이기도 했습니다. 전시 기간 동안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대전에서 하시나요?”였습니다. ‘다다르다 시도’라는 공간이 지닌 정체성에 마음이 오래 머물렀고, 출판계의 행사가 수도권에만 머무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신영복 선생님께서 평생 지켜오신 ‘변방은 창조의 공간’이라는 변방의 정신을 떠올리며, 대전 원도심 대흥동에서 새로운 독자를 만나고 싶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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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처음처럼〉의 큰 풍경은 독자님들의 참여가 모여 더불어숲을 이루는 모습이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을 이미 알고 계신 분들께는 추모의 공간이, 아직 낯선 분들께는 문장을 통해 선생님을 다시 마주하는 공간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좋아하는 마음은 전염된다고 믿습니다. 누군가가 고른 문장 하나가 다른 누군가에게 닿고, 그렇게 마음이 천천히 퍼져나가기를 바랐습니다.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걱정했던 것은 날씨였습니다. 주택 공간에는 충분한 난방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마음이 쓰였습니다. 날씨는 유난히 추웠지만, 공간을 찾아와 주신 독자님들 덕분에 마음만큼은 내내 따뜻했습니다. 주택에서 차 한 잔을 건네며 독자님들이 책을 읽는 풍경을 바라볼 때, 기획자로서 가장 보고 싶었던 장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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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다 우연히 들어온 사람, 대전 여행 중 다다르다 서점에 들렀다가 이곳까지 오게 된 사람, 신영복 선생님의 10주기를 기억하며 먼 길을 온 사람, 누군가의 추천으로 이 공간에 도착한 사람, 두 시간이 넘도록 주택에 머물며 『처음처럼』을 읽던 사람. 그렇게 조금씩 다른 이유로 모인 발걸음 덕분에 대전 원도심 한복판에서 더불어숲은 조금씩 자라날 수 있었습니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장면은 만년고등학교, 대전고등학교, 대신고등학교에서 단체 관람을 온 청소년 독자분들이었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문장을 한 줄 한 줄 들여다보고, 잎사귀 책갈피에 저마다의 문장을 남긴 뒤 책 한 권씩을 품에 안고 돌아가던 모습이 오래 남아 있습니다. 기획자로서 인터뷰에 응답하며 마주한 눈빛 또한 쉽게 잊히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시는 끝났지만 신영복 선생님의 사유와 문장은 독자님들의 삶과 생각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태어날 것이라 믿습니다. 그 문장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또 다른 더불어숲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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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에 오지 못한 독자님들을 위해 온라인 더불어숲을 마련했습니다. 전시장에서 남기고 가신 독자님들의 문장을 온라인에서 읽으실 수 있습니다. 177명의 문장 모두를 옮기지는 못했지만,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한 마음을 전합니다.
전시 마지막 날, 철거를 하며 조심스레 떼어낸 문장들을 모두 읽었습니다. 글은 모든 것을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모든 것을 대변할 수 있는 마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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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대전 다다르다 시도에서 〈다시, 처음처럼〉 팝업 기획전에 함께 했던 문혜라입니다. 저는 대전에서 나고 자라 지금은 사람의 웃는 모습을 포착하는 사진작가를 꿈으로 삼고 있습니다. 전시 공간에서 마주친 얼굴들과 그 표정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인지 〈다시, 처음처럼〉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독자는 수녀님입니다. (물론 5일 연속 방문하셔서 기억을 안 할래야 안 할 수 없었던 사실은 비밀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우연히 유리창 너머 글씨를 보고, 호기심으로 돌 손잡이의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후로도 수녀님은 항상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주셨어요. 마지막 날, 『강의』 한 권을 들고 나가시면서 소녀처럼 웃으셨습니다. 그 미소가 아직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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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는 두 공간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상가에서 주택으로 이어지는 전시 동선을 따라 독자분들과 함께 이동하며 안내했습니다. 고즈넉한 주택에서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오래도록 나누셨어요. 많은 독자분들께서 다다르다 시도에서 선생님의 글을 눈으로 꾹꾹 눌러 담는 모습을 보며 모두가 진심으로 신영복 선생님을 그리워하는 걸 느꼈습니다. 팝업을 통해 신영복 선생님의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저 또한 앞으로 ‘새로운 독자’로 함께할 그 기대가 커지게 되는 경험이었습니다. 북매거진 <행간과 여백> 사랑해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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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강연이나 강의는 ‘듣는다’고 말하는데, 김미옥 작가님의 강연은 집에서 편한 소파나 침대 머리에 기대어 읽히는 강연이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대체 나는 지금, 누구에게 말을 걸 수 있는 사람인가.
김미옥 작가님이 신영복 교수님을 떠올리며 강연하실 때 저절로 행복해하는 모습은, 강연을 읽는 동안 밑줄을 긋지 않을 수 없게 했습니다. 소녀가 된다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김미옥 작가님 강연의 읽힘은 내게 오랫동안 낮은 음으로 울릴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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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간
지혜의 숲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고 이해찬 총리님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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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민주주의와 평화를 위해 헌신하였던 이해찬 전 총리께서 별세하셨습니다. 1970년대 유신반대 학생운동에서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격동하는 시대의 한복판에서 독전관으로서 늘 중심을 지키던 치열한 생애였습니다. 너무도 갑작스럽고 때 이른 별세에 참으로 비통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고인은 출판 민주화 운동의 선구자였습니다. 1978년에 서점 광장서적을 열었고, 1979년에는 출판사 돌베개를 창립하였습니다. ‘돌베개’의 작명은 장준하 선생의 수기 『돌베개』에서 따온 것으로, 민족·민주의 출판 정신을 표상하였습니다. 이러한 출판 정신을 기조로 돌베개 출판사는 1980년대 출판 민주화 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이후 한국의 대표적인 인문 출판사로 성장, 발전하였습니다. 생전에 고인은 “고향에 심어둔 묘목 한 그루가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며 성장, 발전한 돌베개에 대해 흐뭇해하며 고마워했습니다. 그리고 총리 재직 시절 통 큰 결단으로 대폭 늘린 우수학술도서 구입비는 척박한 학술도서 출판을 지키는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출판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기며 출판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잃지 않았던 고인의 따뜻한 마음을 영원히 기억할 것입니다.
늘 살가운 선배이자 형님이었던 이해찬 총리님! 시대가 당신에게 떠맡겼던 그 무거운 짐 이제 내려놓으시고 편히 쉬시길 바랍니다. 당신께서 심으신 ‘돌베개’라는 나무는 더 깊게 뿌리 내리고, 더 넓게 가지 드리워 시대를 밝히는 지혜의 숲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돌베개 대표 한철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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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장을 풀고 하고 싶은 말을 하자. 문체는 바로 여러분 자신이므로, 자신에게 충실하기만 하면 군더더기와 부스러기에 묻혀 있던 문체가 서서히 드러나 날이 갈수록 두드러질 것이다.”
(『글쓰기 생각쓰기』 윌리엄 진서 지음, 돌베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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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격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사람을 만났다. 말끝마다 “- 하고 싶습니다”라는 표현을 붙이는데, 애둘러 말하기의 달인이다. 한 문장에 ‘동사’는 하나면 충분한데 그는 꼭 세 개 이상의 동사를 사용한다. 단순한 지시사항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하세요”, “하십시오”,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면 될 것을 “- 의견을 받고 싶은 생각입니다”, “- 요청을 드리고 싶습니다” 등의 표현으로 문장을 불필요하게 키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꽉 막힌 도로에서 깜빡이만 켠 채 움직이지 못하는 택시 안 승객이 된 느낌이다.
“하고 싶은 말은 간결하게.” “나도 바쁘고 당신도 바쁘다.”가 인생 신조 중 하나인 내게 그의 말버릇은 버겁다. 그는 관형사, 대명사도 무척 즐겨 쓴다. 두 줄이면 끝날 문장을 서너 줄씩 늘리는 기술도 탁월하다. 하루 종일 챗GPT를 돌리는지, 제미나이를 쓰는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은 언제나 자동완성처럼 길어진다. ‘답답해요’라는 이모지를 누르고 싶지만 나는 그저 항복하는 마음으로 두 손을 곧게 쳐든 이모지를 누른다.
왜 말이 매번 길어지고 논점이 흐려지는가. 당신은 지금 ‘마음’을 표현할 때가 아니라 ‘생각’을 정확하게 밝혀야 하는 상황 아닌가? 나는 반문하려다 한마디를 보태고 싶은 욕구를 억누른다.
“핵심을 말하세요. 부디 한 문장에는 하나의 의미만! 주구장창 말한다고 상대가 당신의 마음을 더 헤아리지 않아요. 오히려 요지만 흐릴 뿐이에요.” 내 속내를 슬쩍 건네고 싶지만, 이 충동 또한 눌러 담는다. 내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기에.
『글쓰기 생각쓰기』의 저자 윌리엄 진서는 시종일관 독자들에게 외친다. “간소한 글이 좋은 글이다.”, “버릴 수 있는 만큼 버리자.”,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하는 단어, 짧은 단어로도 표현할 수 있는 긴 단어, 이미 있는 동사와 뜻이 같은 부사.”는 “문장의 힘을 약하게 하는 불순물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언젠가 그의 책상 위에 『글쓰기 생각쓰기』를 한 권 올려 놓고 싶다. 물론 안 읽을 것 같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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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휴대전화에는 여기저기서 저장한 ‘짤’을 모아두는 폴더가 따로 있다. 드라마·영화·예능·웹툰 속 장면과 자막을 캡한 것으로 대부분 나의 내면이나 내가 처해있는 상황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다. ‘안 하는 것도 하고 있는 시간입니다’(배우 구교환 인터뷰) ‘인생 자체가 불편해요’(드라마 <오렌지 이즈 더 뉴 블랙>) ‘돈을 벌어야 해요. 글을 써서 생활비를 마련해야 해요.’(영화 <브라이트 스타>) ‘미친 얘기 같지만 전부 사실이에요.’(영화 <쥬만지>) ‘지금부터 쓸데없다고 여길 만한 일을 또 하고 올게.’(드라마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이때까지 써본 적 없는 허접쓰레기를 써볼게.’(영화 <상사에 대처하는 로맨틱한 자세>) 같은 것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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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내가 자주 골몰하는 질문은 다소 한심하다. 대체 어른은 어떤 사람일까. 나도 어른일까. 혹은 어른이라고 해도 될까. 아마도 어른은 책임이라는 단어와 단짝인 존재. 유진목 시인은 책임을 “체념과 집념이 함께하는 것”이라고 쓴다. “언제나 나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있을 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결국에는 체념하고 집념을 다해 내게 주어진 일을 마친다”(『거짓의 조금』, 유진목 지음, 책읽는수요일) 나도 그렇다. 나는 ‘간신히’와 ‘근근이’의 거주자. 그 와중에 우습게도 꽤 자주 내가 사회에서 ‘1인분’을 못할까 봐 걱정한다. 물론 곧 합리화를 시작한다. 사람이 어떻게 매번 1인분을 하겠어? 때로는 0.7인분을 하고 어떤 때는 1.6인분을 하면서 ‘우리’의 평균이 1인분이 되는 게 훨씬 더 좋은 사회 아닐까? 그러려고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거잖아? 어떻게든 살아진다는 걸 나는 이제 안다. 그런 ‘데이터’가 내게는 쌓여 있다. 이것이야말로 어른의 좋은 점이다.
1인분의 몫을 하고 살기 위해 내가 실천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첫 번째는 구체적인 한 사람을 돕는다. 나는 ‘내 자식’이 없지만, 도움이 필요한 어린이가 세상에 많다는 걸 안다. 어린이 ‘동료 시민’을 함께 키우는 방법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방식은 디딤씨앗통장이다. 디딤씨앗통장은 아동권리보장원에서 아동복지법 제42조·43조에 근거해 운영한다(각종 단체에서 비슷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잘 확인하자). 보호시설에 거주하거나 기초생활보장수급대상자 등 취약계층 아동이 사회에 진출할 때 필요한 학자금이나 보증금 등 초기비용 마련을 지원하기 위해 정부에서 운영하는 ‘유일한’ 아동 자산 형성 지원 사업이다. 10만 원 한도 내에서 내가 매달 내는 만큼 나라에서 두 배를 얹어 적립해 준다. ‘이게 세금 내는 맛이구나’ 하는 효능감이 일단 상당하다. 연말정산도 된다. 무엇보다 후원 아동과 편지 등 감정적으로 교류할 필요가 없다. 이 ‘당연함’이 정말 좋다. 후원 아동이 만 18세가 되면 통장 만기일이 되는데, 만기 알림 문자가 올 때마다 내가 또 한 명의 어린이를 성인으로 키워냈구나 싶어서 뿌듯하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아이는 도움받는 사람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으로 성장할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두 번째로 시민단체에 후원한다. 모태신앙으로 성장해 성인이 된 후 교회를 ‘끊은’ 후에도 나는 십일조를 유지했다. 교회에 내지 않고 사회에 내는 방식으로. 사회에서 벌어지는 각종 문제에 누구도 매번 앞장설 수 없다. 그래서 내가 관심 있는 사회 문제를 중심으로 나를 대신해 싸우는 사람들을 후원한다. 이들은 사회에 대한 불만을, 변화를 위한 의제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투쟁’의 열매는 싸운 사람들만 누리지 않는다. 그들이 발굴한 권리는 놀랍게도 공동의 자원이 된다. 싸움의 맨 앞줄에 선 용감한 사람들에게 우리는 모두 무임승차하고 있는 셈이다. 시민단체 후원은 그 감각을 잊지 않으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어렵지만 나를 바꾸는 건 그것보다는 쉬워서,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이미 온 것처럼 살려고 노력한다. 나의 모순과 세상의 모순을 동시에 견디면서 믿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무엇이 ‘옳은 일’인지는 말이 아니라 삶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다. “세계는 한 번에 바뀌지 않아. 그러니 한 번씩 바꾸면 돼”(『마이너리티 디자인』, 사와다 도모히로, 다다서재)라는 문장을 새해 다짐처럼 꼭 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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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베개 Book Magazine <행간과 여백>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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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장 엄지혜
에디터 정지연
마케터 김영수, 고운성
- 경기도 파주시 회동길 77-20(문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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